「산바람 · 글바람 ㊱」 운악산 산행기, 빛바랜 리본에서 지난날의 나를 만나다
눈이 쌓인 만경대능선
2005년 1월 8일, 마음이 가라앉던 날 운악산으로 향했다. 만경대와 정상, 절고개를 지나 현등사로 내려오는 길에서 한북정맥 종주 때 묶어두었던 빛바랜 빨간 리본을 다시 만나며 지난날의 나를 마주했다.
산바람이 스쳐 간 자리에는 풍경이 남고,
글바람이 머문 자리에는 기억이 남습니다.
산을 걸으며, 마음에 한 페이지를 적어 내려간 기록.
운악산에서 내가 만난 것은 겨울 산의 정상만이 아니었다. 빛바랜 리본 하나 속에 남아 있던, 혼자 길을 견디던 지난날의 나였다.
쉬어도 되는 날, 쉬지 못한 마음
산행일은 2005년 1월 8일이었다.
다음 날에는 북한산에 가기로 약속이 잡혀 있었다. 그러니 오늘 하루쯤은 집에서 쉬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특별한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기분이 자꾸 가라앉았다. 가만히 있으면 생각만 길어질 것 같았다.
원래는 혼자 치악산 종주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서 시작해 어느 길로 내려올지 생각이 길어지는 사이 아침 시간이 흘러갔다. 치악산으로 향하려던 마음은 조금씩 빗나갔지만, 그렇다고 산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가까운 운악산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배낭에 물과 간단한 먹을거리를 주섬주섬 챙겨 넣고 현등사 쪽으로 향했다. 정상에 꼭 올라야 한다는 욕심보다는, 그저 혼자 천천히 걸으며 머릿속에 엉켜 있는 생각을 풀어내고 싶었다.
산은 늘 그런 날에 먼저 떠오른다. 특별한 해결책을 주지는 않지만, 적어도 가만히 앉아 생각만 길어지는 시간을 길 위로 옮겨준다. 마음이 어수선할 때는 앉아서 정리하려고 하기보다, 차라리 걸어야 풀리는 것들이 있다.
그날의 운악산은 그런 마음으로 찾아간 산이었다.
🌿 이번 산행 한눈에 보기
🏔 산행지
운악산
📅 산행일
2005년 1월 8일
🥾 산행 코스
현등사 입구 → 만경대 → 운악산 정상 → 절고개 → 현등사
📏 산행 거리
정확한 거리는 기록하지 않았으나, 현등사 입구를 기준으로 한 원점회귀 겨울 산행
⏱ 산행 시간
반나절 산행
⭐ 난이도
★★★☆☆
운악산은 경기의 악산이라는 이름답게 바위와 능선, 계단 구간이 이어진다. 이날은 눈이 대부분 녹아 심하게 미끄럽지는 않았지만, 겨울철에는 얼음과 응달 구간을 조심해야 한다.
🌳 산행환경
겨울 산행 · 혼자 산행 · 만경대 · 운악산 정상 · 절고개 · 현등사 · 한북정맥 기억 · 빛바랜 리본
🏡 숙박
당일 산행 가능. 가평 현등사권 또는 포천 화현면권 숙박과 연계 가능
🚗 이동방법
자가용 또는 대중교통으로 현등사 입구 접근
겨울 산은 몸을 쉬게 두지 않았다
주말인데도 산에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몇몇 팀이 앞서 걷고 있었고, 부부인지 두 사람씩 나란히 오르는 모습도 보였다. 나는 그들 뒤에서 서두르지 않고 걸었다.
혼자 걷는 산길에서는 생각이 많아진다. 그러나 오래 걷다 보면 신기하게도 그 생각들이 하나씩 줄어든다. 산 아래에서 마음을 어지럽히던 일들은 오르막을 만날 때마다 뒤로 밀려나고, 어느 순간에는 발밑의 돌과 거칠어진 숨소리만 남는다.
멀리 겨울 산의 능선을 바라보며 쉬기도 했다. 잠시 멈추면 등에 밴 땀이 식어 한기가 밀려왔고, 다시 일어서 걸으면 금세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겨울 산은 몸을 쉬게 두지 않았다.
멈추면 춥고, 걸으면 뜨거웠다.
만경대 쪽은 바람이 거의 없었다. 눈도 대부분 녹아 길이 심하게 미끄럽지는 않았다. 겨울 한복판의 운악산치고는 비교적 순한 날이었다.
순한 날이라고 해서 쉬운 산은 아니었다. 운악산은 이름처럼 곳곳에 바위와 오르막을 숨겨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은 그 거친 길마저 나쁘지 않았다. 마음이 가라앉은 날에는 너무 편한 길보다 조금 숨이 차는 길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
숨이 차면 생각이 짧아진다.
생각이 짧아지면 마음도 조금 덜 무거워진다.
한북정맥의 기억
만경대를 지나 정상으로 향하는 동안 문득 지난해 여름이 떠올랐다. 한북정맥을 혼자 종주하며 운악산을 지나던 날이었다.
수많은 봉우리를 넘었지만, 그중에서도 운악산은 유난히 힘들게 남아 있었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바윗길과 오르막을 홀로 견디며 지나갔던 기억이었다.
그때 나는 빨간 리본에 검은 사인펜으로 글씨를 적어 나뭇가지에 매달아두곤 했다. 누군가에게 길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기보다, 내가 이 길을 지나갔다는 작은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사람 하나 없는 능선에서 빨간 리본은 나와 산 사이에 맺은 조용한 약속이었다.
정상 부근에 이르자 문득 그 리본이 아직도 남아 있을지 궁금해졌다. 나뭇가지를 하나씩 살피며 걸었지만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비바람에 떨어졌거나 누군가 치웠을 수도 있었다. 시간이 흘렀으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마음 한쪽에는 작은 아쉬움이 남았다.
산에 남겨둔 흔적은 오래가지 않는다. 바람이 풀어가고, 비가 씻어가고, 누군가의 손이 치워간다. 어쩌면 그래서 더 애틋한지도 모른다. 오래 남기 위해 묶어둔 것이 아니라, 그 순간 내가 그 길을 지나갔다는 것을 나 자신에게라도 말해주고 싶었던 흔적이었으니까.
그렇게 정상을 지나 절고개 쪽으로 내려가던 길이었다.
작은 소나무 가지 끝에서 빛바랜 붉은색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빛바랜 리본을 다시 만나다
한때 선명했을 빨간색은 햇빛과 비바람에 씻겨 낡은 천 조각처럼 바래 있었다. 그러나 검은 유성펜으로 적었던 글씨는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내가 묶어두었던 리본이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지난여름 한북정맥을 걷던 내가 그 자리에 남아, 겨울에 다시 찾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남들이 보든 말든 리본을 손에 쥐고 입을 맞추었다.
별것 아닌 천 조각 하나였지만, 그 안에는 혼자 걷던 날의 고단함과 외로움, 그리고 끝내 길을 포기하지 않았던 시간이 모두 들어 있었다.
산길에 남겨둔 것은 리본 한 장이었지만, 다시 만난 것은 그 시절의 나였다.
그 리본은 낡아 있었다. 색도 바래고, 글씨도 흐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안의 시간은 선명했다. 혼자 산길을 걷던 내 숨소리, 능선에서 느꼈던 막막함, 그래도 길을 이어가던 미련한 마음이 한꺼번에 되살아났다.
사람은 가끔 자기 자신에게도 안부를 묻지 못하고 산다. 잘 견디고 있는지, 그때의 나는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묻지 않은 채 바쁘게 지나간다. 그런데 그날 운악산의 작은 소나무 가지 끝에서, 지난날의 내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잘 돌아왔다고.
잊지 않았다고.
오늘의 시
빛바랜 리본 / 송현
겨울 소나무 끝에
붉은 기억 하나 남아 있었다.
비에 씻기고
바람에 닳아
이름마저 흐려졌지만,
지난여름 길을 걷던 내가
그곳에서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낡은 리본을 붙잡고
말없이 입을 맞추었다.
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잊지 않았다고,
잘 돌아왔다고
가만히 가지를 흔들어주었다.
절고개로 내려오는 겨울
절고개로 내려오는 길에는 겨울이 깊이 들어앉아 있었다. 계곡물은 얼어붙어 작은 폭포가 되었고, 언제 내렸는지 모를 눈은 응달마다 그대로 남아 있었다.
얼음 위에 발을 잘못 디디면 금세 미끄러질 것 같아 한 걸음 한 걸음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산 위에서는 물이 모두 얼어 있었지만, 아래로 내려올수록 얼음 사이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같은 산 안에서도 위와 아래의 계절은 달랐다.
정상 가까이는 모든 것이 얼어붙은 겨울이었고, 현등사 쪽으로 내려오자 계곡 아래에서 물이 조금씩 길을 만들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절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그 물소리가 좋았다. 얼어붙은 것처럼 보이는 계곡 아래에서도 물은 제 길을 찾고 있었다. 사람 마음도 그럴지 모른다. 겉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아도, 보이지 않는 안쪽에서는 조금씩 흐름이 생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물소리를 따라 천천히 내려왔다.
현등사를 지나 내려오다
현등사를 지나 산을 내려왔다. 자주 찾았던 산인데도 운악산은 올 때마다 조금씩 다르게 다가왔다. 어린 시절부터 다녀서인지, 힘들게 한북정맥을 넘었던 기억 때문인지, 이제는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정이 들었다.
산 아래 식당에서 두부 한 접시로 늦은 점심을 대신했다. 뜨끈하고 담백한 두부를 먹으며 얼었던 몸을 녹인 뒤 서울로 향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눈바람이 나를 맞았다.
산에서는 내려왔지만 마음속에는 아직 정리하지 못한 무엇인가 남아 있었다. 운악산에서 오래전 리본을 만나고도 허전함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마 처음부터 가고 싶었던 치악산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은 운악산에서 지난날의 나를 만났다. 그러나 또 다른 길에서는 아직 만나지 못한 내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어딘가로 다시 떠나야 할 것 같은 마음.
나는 벌써 다음 산을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에는 미루지 않고 치악산의 긴 능선을 걸어보리라.
산은 언제나 먼저 부르지 않는다. 다만 그 자리에 서서, 사람이 스스로 길을 나설 때까지 조용히 기다릴 뿐이다.
에필로그|산에 남겨둔 것은 리본이 아니라 나였다
운악산으로 간 날은 쉬어도 되는 하루였다. 다음 날 북한산 약속이 있었으니 집에서 조용히 쉬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생각만 길어질 것 같았다.
처음에는 치악산 종주를 생각했다. 그러나 코스를 고민하는 사이 아침은 지나갔고, 마음은 조금씩 방향을 잃었다. 그렇다고 산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가까운 운악산으로 향했다.
겨울 운악산은 비교적 순했다. 눈은 많이 녹아 있었고, 만경대 쪽에는 바람도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산은 산이었다. 멈추면 한기가 밀려왔고, 걸으면 금세 등에 땀이 흘렀다. 겨울 산은 몸을 쉬게 두지 않았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서 지난해 여름 한북정맥을 혼자 걷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빨간 리본에 검은 사인펜으로 글씨를 적어 나뭇가지에 매달아두곤 했다. 누군가에게 길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기보다, 내가 이 길을 지나갔다는 작은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정상 부근에서 그 리본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바람에 떨어졌거나 누군가 치웠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절고개 쪽으로 내려가던 길, 작은 소나무 가지 끝에서 빛바랜 붉은색 하나가 보였다.
내가 묶어두었던 리본이었다.
한때 선명했던 빨간색은 햇빛과 비바람에 씻겨 낡아 있었고, 글씨도 희미해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지난여름의 내가 그곳에서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리본을 손에 쥐고 입을 맞추었다. 남들이 보면 우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작은 천 조각 안에는 혼자 걷던 날의 고단함과 외로움, 그리고 끝내 길을 포기하지 않았던 시간이 들어 있었다.
산길에 남겨둔 것은 리본 한 장이었지만, 다시 만난 것은 그 시절의 나였다.
절고개로 내려오는 길에는 얼음과 눈이 남아 있었다. 계곡물은 얼어붙어 작은 폭포가 되었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얼음 사이로 물소리가 들렸다. 같은 산 안에서도 위와 아래의 계절은 달랐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절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현등사를 지나 산을 내려와 두부 한 접시로 몸을 녹였다. 서울에 도착하니 눈바람이 불고 있었다. 운악산에서 지난날의 나를 만났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 치악산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산행은 늘 그런 식으로 이어진다. 오늘 한 산을 내려오면, 마음속에서는 벌써 다음 산이 길을 연다. 운악산은 나에게 지난날의 나를 보여주었고, 치악산은 아직 만나지 못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미루지 않고 그 긴 능선을 걸어보리라.
🌿 이 산행을 준비하는 분들을 위해
운악산은 경기도 포천과 가평에 걸쳐 있는 산으로, 현등사 입구를 기준으로 만경대와 정상, 절고개를 돌아 내려오는 코스가 많이 알려져 있다. 바위와 능선, 계곡과 사찰이 함께 어우러져 사계절 산행지로 찾는 사람이 많다.
겨울 운악산은 눈이 많지 않아 보여도 응달에는 얼음이 남아 있을 수 있다. 특히 절고개와 계곡으로 내려오는 길은 얼어붙은 구간이 있을 수 있어 아이젠과 스틱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운악산은 짧은 산행처럼 보여도 바위와 오르내림이 있어 체력 안배가 필요하다.
산행 준비 메모
첫째, 겨울 운악산은 응달과 계곡길을 조심해야 한다.
눈이 녹은 것처럼 보여도 얼음이 남아 있을 수 있다. 특히 하산길은 오를 때보다 더 조심해야 한다.
둘째, 현등사 입구 코스는 사찰과 계곡, 능선을 함께 만날 수 있다.
산행 뒤 현등사와 주변 계곡을 천천히 둘러보면 운악산의 분위기를 더 깊게 느낄 수 있다.
셋째, 혼자 산행할 때는 무리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마음이 어지러워 산을 찾는 날일수록 속도를 줄이고, 하산 시간을 여유 있게 잡는 것이 좋다.
넷째, 산길에 남긴 흔적은 자연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조심해야 한다.
지금은 리본이나 표식을 개인적으로 남기기보다 정해진 등산로와 공식 표지를 따르는 것이 좋다. 지나간 시간은 마음에 남겨도 충분하다.
🌿 관련 사이트 및 여행 정보
① 포천문화관광 운악산
운악산의 포천 쪽 산행 정보와 주변 관광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② 가평군 문화관광
운악산, 현등사, 가평 조종면 일대 관광 정보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③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운악산 현등사
현등사의 역사와 문화유산 정보를 참고할 수 있다.
④ 포천문화관광
운악산과 포천의 산, 계곡, 숙박, 먹거리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⑤ 국립공원공단 치악산국립공원
다음 산행지인 치악산 종주코스와 탐방 정보를 미리 확인할 수 있다.
🌿 운악산 겨울 산행 준비물 체크리스트
□ 아이젠
□ 등산 스틱
□ 접지력 좋은 등산화
□ 방한 장갑
□ 가벼운 보온 재킷
□ 바람막이
□ 따뜻한 물
□ 간단한 행동식
□ 여벌 양말
□ 보조배터리
□ 하산 시간 여유 있게 잡기
□ 응달 얼음길 주의
□ 현등사 주변 식당 확인
□ 혼자 산행 시 가족·지인에게 코스 공유
□ 지난날의 나를 너무 다그치지 않는 마음
□ 다음 산을 미루지 않는 마음
🌿 추천 숙박과 주변 여행
🏡 가평 현등사·조종면권
현등사 입구에서 운악산을 오르는 경우 가평 조종면 일대 숙박과 식당을 함께 고려할 수 있다. 산행 뒤 현등사와 계곡, 주변 두부 음식점 등을 함께 둘러보기 좋다.
🏡 포천 화현면·운악산권
포천 쪽에서 운악산을 오르거나 운악산자연휴양림, 산정호수, 포천아트밸리 등과 함께 여행을 묶고 싶다면 포천 화현면권 숙박도 좋다.
🌄 이전 산행 이야기 다시보기
「산바람 · 글바람 ㉟」 연인산 산행기, 바람처럼 넘어 백둔리에서 쉬다
연인산에서는 국수당에서 시작해 우정고개와 우정봉, 연인산 정상을 지나 백둔리로 내려왔습니다. 산행 뒤 계곡가 펜션에서 비 오는 저녁을 보내며, 숯불 삼겹살과 친구들의 웃음 속에서 행복은 멀리 있지 않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연인산이 함께 걷고 함께 쉬며 사람의 정을 품고 돌아온 산이었다면, 운악산은 혼자 걷는 겨울 산길에서 지난날의 나를 다시 만난 산이었습니다. 하나는 곁에 있는 사람들의 따뜻함을 보여준 산이었고, 하나는 오래전 내가 남겨둔 작은 흔적이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음을 알려준 산이었습니다.
🌄 다음 산행 이야기
「산바람 · 글바람 ㊲」 치악산 종주 산행기
운악산에서는 쉬어도 되는 하루에 마음이 가라앉아 혼자 산길로 들어섰습니다. 만경대와 운악산 정상, 절고개를 지나 현등사로 내려오는 길에서 한북정맥 때 묶어두었던 빛바랜 리본을 다시 만났고, 그 작은 천 조각 속에서 지난여름의 나와 마주했습니다.
다음 산행은 치악산 종주로 이어집니다. 운악산에서 처음 마음먹었던 치악산을 미뤄두었지만, 산은 마음속에 남은 길을 쉽게 지우지 않습니다. 운악산이 지난날의 나를 다시 만나게 한 산이었다면, 치악산에서는 긴 능선 위에서 아직 만나지 못한 나를 찾아 걷게 될 것입니다.
🍃 산길의 끝에서
운악산으로 간 날은 쉬어도 되는 하루였다. 다음 날 북한산 약속이 있었으니 집에서 조용히 쉬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마음이 가라앉아 있었다. 가만히 있으면 생각만 길어질 것 같았다.
처음에는 치악산 종주를 생각했다. 그러나 코스를 고민하는 사이 아침은 지나갔고, 마음은 조금씩 방향을 잃었다. 그렇다고 산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결국 가까운 운악산으로 향했다.
겨울 운악산은 비교적 순했다. 눈은 많이 녹아 있었고, 만경대 쪽에는 바람도 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산은 산이었다. 멈추면 한기가 밀려왔고, 걸으면 금세 등에 땀이 흘렀다. 겨울 산은 몸을 쉬게 두지 않았다.
정상으로 향하는 길에서 지난해 여름 한북정맥을 혼자 걷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나는 빨간 리본에 검은 사인펜으로 글씨를 적어 나뭇가지에 매달아두곤 했다. 누군가에게 길을 알려주기 위해서라기보다, 내가 이 길을 지나갔다는 작은 흔적을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정상 부근에서 그 리본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바람에 떨어졌거나 누군가 치웠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절고개 쪽으로 내려가던 길, 작은 소나무 가지 끝에서 빛바랜 붉은색 하나가 보였다.
내가 묶어두었던 리본이었다.
한때 선명했던 빨간색은 햇빛과 비바람에 씻겨 낡아 있었고, 글씨도 희미해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 지난여름의 내가 그곳에서 아직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리본을 손에 쥐고 입을 맞추었다. 남들이 보면 우스웠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작은 천 조각 안에는 혼자 걷던 날의 고단함과 외로움, 그리고 끝내 길을 포기하지 않았던 시간이 들어 있었다.
산길에 남겨둔 것은 리본 한 장이었지만, 다시 만난 것은 그 시절의 나였다.
절고개로 내려오는 길에는 얼음과 눈이 남아 있었다. 계곡물은 얼어붙어 작은 폭포가 되었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얼음 사이로 물소리가 들렸다. 같은 산 안에서도 위와 아래의 계절은 달랐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절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현등사를 지나 산을 내려와 두부 한 접시로 몸을 녹였다. 서울에 도착하니 눈바람이 불고 있었다. 운악산에서 지난날의 나를 만났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 치악산이 남아 있었다.
어쩌면 산행은 늘 그런 식으로 이어진다. 오늘 한 산을 내려오면, 마음속에서는 벌써 다음 산이 길을 연다. 운악산은 나에게 지난날의 나를 보여주었고, 치악산은 아직 만나지 못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미루지 않고 그 긴 능선을 걸어보리라.
다음 산길에서 다시 만나겠습니다.
⭐ 산바람 · 글바람
쉬어도 되는 하루였습니다.
다음 날에는
북한산 약속이 있었고,
오늘 하루쯤은
집에서 조용히 쉬어도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마음이
자꾸 가라앉았습니다.
가만히 있으면
생각만 길어질 것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치악산 종주를 꿈꾸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길로 오르고
어디로 내려올지
생각이 길어지는 사이,
아침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습니다.
치악산으로 향하려던 마음은
빗나갔지만,
그렇다고 산을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결국 운악산으로 향했습니다.
혼자 천천히 걸으며
머릿속에 엉켜 있는 생각을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겨울 산은
몸을 쉬게 두지 않았습니다.
멈추면 춥고,
걸으면 뜨거웠습니다.
만경대를 지나
정상으로 향하는 길,
문득 지난해 여름
한북정맥을 혼자 걷던 날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나는
빨간 리본에
검은 사인펜으로 글씨를 적어
나뭇가지에 매달아두곤 했습니다.
누군가에게 길을 알려주기보다,
내가 이 길을 지나갔다는
작은 흔적을 남기고 싶었습니다.
정상 부근에서
그 리본을 찾았지만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흘렀으니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절고개 쪽으로 내려가던 길,
작은 소나무 가지 끝에서
빛바랜 붉은색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습니다.
한때 선명했을 빨간색은
햇빛과 비바람에 씻겨
낡은 천 조각처럼 바래 있었고,
검은 유성펜 글씨만
희미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내가 묶어두었던 리본이었습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릅니다.
지난여름 한북정맥을 걷던 내가
그 자리에 남아,
겨울에 다시 찾아온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남들이 보든 말든
리본을 손에 쥐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별것 아닌 천 조각 하나였지만,
그 안에는
혼자 걷던 날의 고단함과 외로움,
그리고 끝내 길을
포기하지 않았던 시간이
모두 들어 있었습니다.
산길에 남겨둔 것은
리본 한 장이었지만,
다시 만난 것은
그 시절의 나였습니다.
절고개로 내려오는 길에는
겨울이 깊이 들어앉아 있었습니다.
계곡물은 얼어붙어
작은 폭포가 되었고,
아래로 내려올수록
얼음 사이로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같은 산 안에서도
위와 아래의 계절은 달랐습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계절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현등사를 지나
산을 내려왔습니다.
두부 한 접시로
얼었던 몸을 녹이고
서울로 향했습니다.
서울에 도착하니
눈바람이 나를 맞았습니다.
운악산에서
지난날의 나를 만났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아직 치악산이 남아 있었습니다.
오늘은
운악산에서
지나온 나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또 다른 길에서는
아직 만나지 못한 내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습니다.
산은 언제나
먼저 부르지 않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 서서,
사람이 스스로 길을 나설 때까지
조용히 기다릴 뿐입니다.
이번에는
미루지 않고
치악산의 긴 능선을 걸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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