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바람 · 글바람 ㉚」 양구 사명산 산행기, 기다림을 내려놓고 걷다
2012년 10월 7일, 멈춰버린 양구의 현장을 뒤로하고 사명산으로 들어섰다. 600미터마다 나타나는 이정표를 따라 걷고,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단풍과 낙엽을 만나며 기다림 대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갔다.
산바람이 스쳐 간 자리에는 풍경이 남고,
글바람이 머문 자리에는 기억이 남습니다.
산을 걸으며, 마음에 한 페이지를 적어 내려간 기록.
사명산에서는 기다림이 멈춘 자리에 길이 있었다. 나는 그 길을 따라, 다시 움직이는 법을 배웠다.
멈춰버린 현장 앞에서
산행일은 2012년 10월 7일이었다.
그 무렵 나는 현장 일로 강원도 양구에 머물고 있었다. 공사는 멈췄고, 현장은 부도가 난 채 방치되어 있었다. 다시 공사가 시작될지, 이대로 끝나버릴지 아무도 확실하게 말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매일 멈춰버린 현장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기다렸다. 기다리는 날들이 길어질수록 마음도 흐트러졌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하지 않은 채 숙소와 현장만 오가는 내 모습도 우스웠다.
양구에는 좋은 산이 많았다. 어쩌면 이런 때일수록 산에라도 올라야 했다. 모처럼 주어진 시간이라 생각하고, 가까운 사명산을 혼자 오르기로 했다.
아침 일찍 물과 간단한 먹을거리를 챙겼다. 산으로 가기 전 현장에 잠시 들렀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현장에는 토종닭 여덟 마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나타나면 아빠라도 만난 듯 몰려오는 녀석들에게 사료를 넉넉히 뿌려주고 사명산 들머리가 있는 웅진리로 향했다.
동네에서 함께 버섯을 따고 고기도 잡던 붕이 아저씨에게 같이 가자고 했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쓸데없이 뭐 하러 산을 가?”
버섯이나 물고기라면 누구보다 먼저 나서는 사람이었지만, 등산이라는 말만 나오면 고개를 저었다. 산이 힘든 것인지, 아무것도 얻어 내려오지 못하는 산행이 싫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둘 다인 것 같았다.
정상까지 간다는 말 자체가 그에게는 부담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사람에게 산은 버섯과 물고기를 내어주는 곳이고, 어떤 사람에게 산은 그냥 올라갔다 내려오는 길이다. 그날 내게 사명산은 기다림을 잠시 내려놓을 수 있는 길이었다.
🌿 이번 산행 한눈에 보기
🏔 산행지
강원도 양구 사명산
📅 산행일
2012년 10월 7일
🥾 산행 코스
웅진리 들머리 → 600m 이정표 구간 → 능선길 → 사명산 정상 → 헬기장 → A코스 하산 방향 → 임도 일부 차량 이동
📏 산행 거리
정상까지 약 6km, 왕복 기준 약 12km 안팎의 코스
이날은 하산 중 임도 일부를 차량으로 이동해 실제 도보 거리는 그보다 짧았다.
⏱ 산행 시간
오전 8시 30분 산행 시작
정확한 종료 시간은 기록하지 못했지만, 점심과 하산 이동을 포함한 반나절 산행
⭐ 난이도
★★★☆☆
초반부터 오르막이 이어지고, 정상까지 거리가 짧지 않다. 다만 이정표가 비교적 잘 되어 있어 혼자 걷기에도 길의 흐름은 또렷했다.
🌳 산행 환경
가을 단풍 · 낙엽길 · 혼자 산행 · 600m 이정표 · 개금버섯 · 산부추 · 헬기장 · 임도 · 양구 산골 풍경
🏡 숙박
양구읍 또는 소양호·파로호 주변 숙박과 연계 가능
🚗 이동방법
자가용으로 양구 웅진리 들머리 접근
웅진리에서 다시 묶은 등산화 끈
웅진리에 도착하니 아침 8시가 넘었다. 혼란한 세상을 따라 마음도 흐트러져 있었고, 등산화 끈마저 느슨해져 있었다. 다리 앞에 서서 끈을 단단히 다시 맸다.
다리를 건너 사명산 입구에 들어선 시간은 오전 8시 30분이었다.
예전에 송이를 딴다며 이 산에 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600미터 이정표가 있는 곳까지 올라갔지만, 송이는 구경도 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러나 오늘의 목적은 송이도 버섯도 아니었다.
오직 사명산 정상까지 걸어보는 일이었다.
내가 선택한 길은 약 6킬로미터의 B코스였다. 예상대로 산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늘도 나와 산만 남은 혼자만의 산행이었다.
혼자 산에 들어설 때는 이상한 적막이 따라붙는다. 누군가와 같이 걸을 때는 길이 대화로 채워지지만, 혼자 걸을 때는 발소리와 숨소리, 그리고 마음속 말들이 길을 채운다. 그날의 사명산은 내게 조용히 물었다.
무엇을 그렇게 기다리고 있느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다만 첫 번째 이정표를 향해 걸었다.
600미터마다 기다리던 이정표
첫 번째 목표는 600미터 이정표였다. 산길은 처음부터 가파르게 이어졌다. 숨을 몰아쉬며 첫 이정표에 도착하니 오전 9시였다. 생각보다 길이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이정표가 600미터 간격으로 차례차례 나타났다. 이정표는 잘 정비되어 있었다. 양구군에서 사명산에 꽤 많은 정성을 들인 듯했다. 혼자 걷는 길이라 힘들 때도 있었지만, 일정한 간격으로 기다리고 있는 이정표는 길 위의 친구 같았다.
조금만 더 오면 된다.
말이 없는 이정표가 그렇게 격려해주는 듯했다.
사명산에는 여러 등산 코스가 있지만 대중교통이 불편해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산길은 조용했다. 사람이 많지 않은 산은 때로 쓸쓸하지만, 그 쓸쓸함 때문에 더 깊어진다. 누가 앞에서 끌어주지 않아도, 누가 뒤에서 밀어주지 않아도, 나는 이정표 하나를 지나고 또 하나를 지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길가에는 며칠 전까지 따러 다녔던 개금버섯이 보였다. 일부러 내 앞을 막아서며 자신을 채취해가라는 듯했다. 그러나 오늘은 버섯 산행이 아니었다. 나는 발끝으로 버섯을 비켜 지나갔다.
오늘은 무엇을 얻으러 온 날이 아니었다.
무엇을 내려놓으러 온 날이었다.
단풍이 먼저 말을 걸던 산길
산 한쪽으로는 소양강 물줄기가 능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듯 보였다. 참나무 잎은 누렇게 물들기 시작했고, 계절은 산속에서 천천히 물감의 색을 바꾸고 있었다.
조금 더 오르자 설악산의 단풍이 부럽지 않을 만큼 붉고 노란 잎들이 산길을 채웠다. 아무도 없는 길에서 단풍들은 새색시가 색동옷을 입은 것처럼 반갑게 나를 맞았다.
높은 산답게 길은 오르내림을 반복했다. 능선을 하나 넘으면 또 다른 오르막이 나타났다. 생각보다 긴 산길이었지만, 혼자였기에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초겨울을 앞둔 산의 정취를 천천히 느꼈다. 발밑에 수북하게 쌓인 낙엽은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가끔 산부추도 눈에 띄었다. 물 대신 잎을 뜯어 씹으니 알싸하고 약간 매운맛이 입안에 번졌다.
그렇게 가을을 씹으며 산을 올랐다.
사명산의 가을은 화려하게 떠드는 가을이 아니었다. 사람이 많지 않은 산길에서 단풍은 조용히 제 색을 내고 있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낙엽이 조금씩 움직였고, 그 움직임은 오래 기다리던 마음을 천천히 풀어주는 손길 같았다.
오늘의 시
사명산의 기다림 / 송현
멈춰버린 현장을 등지고
사명산으로 들어갔다.
육백 미터마다
이정표 하나 기다리고,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는
단풍이 먼저 말을 걸었다.
가을은 여기저기
붉은 손을 흔들었지만,
내 마음은
오지 않는 소식만 기다리며
계절의 끝에 서 있었다.
산은 오라 손짓하고
나는 한참 바라만 보았다.
돌아보면 그날도
산을 오른 것이 아니라,
기다림 속을
천천히 걸어간 것이었다.
정상에서 만난 사람들
정상 가까이에 이르자 올라오는 동안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몇 명씩 나타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임도까지 승용차가 올라올 수 있었다.
인천에서 왔다는 사람들은 나를 보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농담을 건넸다.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서로 사진을 찍어주고 그들은 먼저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또 서너 명이 올라왔다. 멀리서 무전기 소리도 요란하게 들려왔다.
“몇 명이나 더 옵니까?”
내가 묻자 한 사람이 대답했다.
“한 스무 명쯤 옵니다.”
정상에서 조용히 쉬려던 마음은 접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서둘러 정상에서 내려와 올라오는 길에 봐두었던 헬기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A코스로 하산할 생각이었다.
혼자만의 산이라고 생각했던 길도 정상에 가까워지면 사람을 만난다. 산은 묘하다. 외로움을 달래려고 들어가면 사람을 만나게 하고, 사람을 피해 들어가면 또 사람의 정을 건넨다.
그날도 그랬다. 정상의 조용함은 오래 허락되지 않았지만, 대신 산은 헬기장에서 또 다른 인연을 준비하고 있었다.
헬기장의 막걸리 한잔
헬기장에는 인천에서 온 다섯 사람이 점심을 먹고 있었다.
“혼자 오셨어요? 한잔하고 가세요.”
깜빡하고 막걸리를 챙겨오지 않았던 터라 그 말이 무척 반가웠다. 혼자 쉬지 않고 걸어왔더니 막걸리 한잔이 간절했다. 어차피 같은 방향으로 내려간다고 하기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산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도 술잔 하나를 사이에 두면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가까워진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막걸리를 마시고, 함께 하산하기로 했다.
산에서 건네는 한잔은 이상하게 사람을 무장해제시킨다. 이름도 모르고, 사는 곳도 잘 모르고, 다시 만날 일도 없을지 모르지만, 그 순간만큼은 같은 산길을 걷는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로 충분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나는 혼자였다. 멈춰버린 현장과 오지 않는 소식, 느슨해진 마음을 안고 혼자 사명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헬기장에 앉아 막걸리 한잔을 받는 순간, 기다림에 묶여 있던 마음이 조금 느슨해졌다.
산은 가끔 이렇게 엉뚱한 방식으로 사람을 풀어준다.
차를 타고 내려온 마지막 길
길가의 단풍은 내려가는 사람의 발길을 붙잡으려는 듯 더욱 짙어져 있었다. 울긋불긋한 잎들이 자꾸만 곁으로 다가와 나를 꼬셨다.
임도에 내려섰지만 산길은 아래로 3킬로미터 넘게 더 이어져 있었다. 그때 그 사람들이 차를 타고 내려가자고 했다. 차 안에는 자리도 넉넉하지 않았지만, 나는 몸을 비집고 올라탔다.
차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후회가 밀려왔다.
그냥 걸어 내려갈걸.
하산 코스를 끝까지 확인하지 못한 것도 아쉬웠고, 멀쩡한 산길을 두고 차에 올라탄 나 자신이 우스웠다. 산을 걸으러 온 사람이 마지막 길을 차로 내려가고 있으니, 잠시 정신이 나간 사람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더구나 차는 임도에서 길을 찾지 못하고 한 시간 가까이 헤맸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끝까지 걸어 내려오는 편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사명산은 그렇게 조금 모자란 산행으로 남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모자람 때문에 더 오래 남았다. 완벽하게 끝낸 산행이었다면 그냥 좋은 기억으로만 남았을지 모른다. 그런데 끝까지 걷지 못한 마지막 3킬로미터는 계속 마음에 걸렸다.
산행에서 남는 것은 정상만이 아니다. 때로는 걷지 못한 길, 놓친 길, 아쉬움으로 남은 길이 더 오래 사람을 부른다.
기다림과 산길은 달랐다
오랜만에 혼자 오래 걸어서인지 다리는 뻐근했다. 그래도 몸의 피로보다 더 크게 남은 것은 끝까지 걷지 못했다는 아쉬움이었다.
산을 오르기 전 나는 부도가 난 현장을 바라보며 무언가가 다시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산에 들어선 동안만큼은 기다리지 않아도 되었다. 이정표 하나를 지나고, 단풍 한 그루를 지나며 내가 직접 앞으로 걸으면 되었다.
산길은 기다림과 달랐다.
기다림은 사람을 제자리에 붙잡아두지만, 산길은 느리더라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날 사명산에서 내가 배운 것은 그것이었다.
현장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누군가의 결정, 누군가의 연락, 다시 시작된다는 소식만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산에서는 달랐다. 숨이 차면 쉬면 되고, 길이 가파르면 천천히 오르면 되고, 이정표가 보이면 그곳까지 가면 되었다.
기다림 속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지만, 산길에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했다.
한 걸음.
그리고 또 한 걸음.
그 단순한 움직임이 흐트러진 마음을 다시 붙잡아주었다.
다시 간다면
끝까지 걷지 못한 마지막 3킬로미터가 오래 마음에 남았다. 어쩌면 그 아쉬움 때문에 사명산은 더욱 잊히지 않는 산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다시 그 산에 간다면 이번에는 어느 차에도 오르지 않을 것이다. 흐트러진 등산화 끈을 다시 단단히 묶고, 낙엽 쌓인 마지막 길까지 내 두 발로 천천히 걸어 내려올 것이다.
사람은 늘 완성된 기억만 품고 사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조금 덜 끝난 이야기, 마지막 문장을 쓰지 못한 날들이 오래 남는다. 사명산은 내게 그런 산이었다.
정상에 올랐지만, 산행은 끝나지 않았다. 차를 타고 내려왔지만, 마음은 아직 그 마지막 3킬로미터의 산길 위에 남아 있었다.
아마 언젠가 다시 사명산에 가게 된다면, 나는 그 길을 마저 걸으러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정상보다도, 단풍보다도, 헬기장의 막걸리보다도, 그날 놓고 온 마지막 길을 찾으러.
에필로그|기다림을 내려놓고
양구에 머물던 그 시절, 나는 매일 멈춰버린 현장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공사가 다시 시작될지, 이대로 끝나버릴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기다림은 사람을 이상하게 지치게 한다. 몸을 쓰지 않았는데도 피곤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닳아간다.
그런 날 사명산에 올랐다. 산으로 가기 전 현장에 들러 토종닭 여덟 마리에게 사료를 뿌려주고, 웅진리로 향했다. 다리 앞에서 느슨해진 등산화 끈을 다시 묶었다. 생각해보면 그 끈을 묶던 순간부터 마음도 조금씩 다시 묶이고 있었는지 모른다.
사명산의 길은 처음부터 만만하지 않았다. 그러나 600미터마다 이정표가 나타났다. 그 이정표들은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에 지쳐 있던 내가, 길 위에서는 누군가에게 기다림을 받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가을 단풍은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개금버섯은 길가에서 눈에 띄었지만, 그날은 버섯을 얻으러 간 날이 아니었다. 산부추의 알싸한 맛을 씹고, 낙엽을 밟으며, 나는 조금씩 현장의 걱정에서 멀어졌다.
정상에서는 사람들을 만났고, 헬기장에서는 막걸리 한잔을 얻어 마셨다. 산에서는 참 이상하게도 처음 만난 사람들과도 금세 가까워진다. 산길에서 나눈 술 한잔은 때로 긴 설명보다 마음을 빨리 풀어준다.
다만 마지막 길을 끝까지 걷지 못한 것은 오래 아쉬움으로 남았다. 임도에서 차를 얻어 타고 내려왔지만, 차는 길을 헤맸고 나는 곧 후회했다. 그냥 걸어 내려올걸. 그 마지막 3킬로미터는 지금도 사명산 어딘가에 남아 있는 듯하다.
사명산은 기다림을 끝내준 산은 아니었다. 현장의 문제가 그날 바로 해결된 것도 아니고, 기다리던 소식이 산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산에 있는 동안 나는 기다리지 않았다. 걸었다. 그 차이가 나를 조금 살렸다.
기다림은 사람을 제자리에 묶어두지만, 산길은 사람을 앞으로 가게 한다. 느려도 좋고, 숨이 차도 좋다. 한 걸음씩 옮기다 보면, 마음도 조금씩 이동한다.
그날 사명산에서 나는 기다림을 완전히 내려놓지는 못했다. 다만 그것을 잠시 배낭 한쪽에 넣어두고 걸었다. 그리고 알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에도, 적어도 한 걸음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사명산은 그래서 오래 남았다. 정상보다, 단풍보다, 헬기장의 막걸리보다, 마지막에 걷지 못한 길 하나 때문에 더 오래 남았다.
다시 그 산에 간다면, 이번에는 어느 차에도 오르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3킬로미터까지, 내 두 발로 천천히 걸어 내려올 것이다.
🌿 이 산행을 준비하는 분들을 위해
사명산은 강원도 양구와 화천, 춘천 일대에 걸쳐 있는 산으로 알려져 있다. 정상에서는 날씨가 좋을 때 소양호와 파로호, 양구와 화천 일대의 산줄기를 조망할 수 있다고 소개된다.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답고,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 겨울에는 설경도 만날 수 있는 산이다.
웅진리에서 오르는 길은 비교적 조용하고, 일정한 간격의 이정표가 있어 길의 흐름을 잡기 좋다. 다만 대중교통이 편한 산은 아니므로 자가용 이동이나 하산 계획을 미리 세우는 것이 좋다. 임도와 산길이 섞이는 구간이 있어, 끝까지 걸을지 차량 이동이 가능한지 미리 확인하면 산행 후 아쉬움을 줄일 수 있다.
산행 준비 메모
첫째, 사명산은 조용하지만 만만한 산은 아니다.
초반부터 오르막이 이어지고 정상까지 거리가 짧지 않다. 혼자 산행할 때는 시간과 체력을 여유 있게 잡는 것이 좋다.
둘째, 하산 코스를 미리 확인해야 한다.
임도와 산길이 만나는 구간이 있어, 어디까지 걸을지 미리 정해두면 좋다. 차를 얻어 타는 편한 길이 오히려 아쉬움으로 남을 수도 있다.
셋째, 가을 산행에는 낙엽길을 조심해야 한다.
낙엽 아래 돌이나 젖은 흙이 숨어 있을 수 있다. 단풍이 아름다울수록 발밑도 함께 살피는 것이 좋다.
🌿 관련 사이트 및 여행 정보
① 양구문화관광 사명산
사명산 조망과 양구 지역 여행 정보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② 대한민국 구석구석 양구 사명산 MTB여행길
사명산 주변 길과 소양호, 파로호를 품은 양구 산줄기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③ 양구문화관광
양구의 산, 호수, DMZ 관광지, 숙박과 먹거리 정보를 함께 확인할 수 있다.
④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명산
사명산의 지명과 지리적 특징을 참고할 수 있다.
⑤ 홍천문화관광 공작산
다음 산행지인 홍천 공작산의 위치와 산행 정보를 미리 살펴볼 수 있다.
🌿 사명산 산행 준비물 체크리스트
□ 충분한 식수
□ 간단한 행동식
□ 등산 스틱
□ 접지력 좋은 등산화
□ 가을 바람막이
□ 여벌 양말
□ 지도 또는 산행 앱
□ 보조배터리
□ 하산 코스 확인
□ 대중교통 또는 차량 회수 계획
□ 혼자 산행 시 가족·지인에게 코스 공유
□ 막걸리를 깜빡하지 않는 마음
□ 마지막 길까지 걸어보려는 마음
🌿 추천 숙박과 주변 여행
🏡 양구읍권
사명산 산행 전후로 양구읍권 숙박을 이용하면 접근이 비교적 편하다. 양구 중앙시장, 박수근미술관, 양구수목원, 한반도섬 등과 함께 여행을 묶기 좋다.
🏡 소양호·파로호 주변
사명산은 소양호와 파로호를 품은 산줄기와 함께 기억되는 산이다. 산행 뒤 호수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면 양구 산골의 조용한 풍경을 더 깊게 느낄 수 있다.
🌄 이전 산행 이야기 다시보기
「산바람 · 글바람 ㉙」 계방산 산행기, 폭우 속에서 마음을 씻다
계방산에서는 아무 계획 없이 서울을 벗어나 운두령에 닿았고, 폭우와 안개 속에서 정상에 올랐습니다. 멋진 조망은 없었지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마음속 답답함을 씻어낸 하루였습니다.
계방산이 폭우 속에서 마음을 씻어준 산이었다면, 사명산은 기다림에 지친 마음을 다시 걷게 한 산이었습니다. 하나는 비로 마음을 씻어냈고, 하나는 600미터마다 나타나는 이정표로 마음을 앞으로 데려갔습니다.
🌄 다음 산행 이야기
「산바람 · 글바람 ㉛」 홍천 공작산 산행기
사명산에서는 멈춰버린 현장과 길어진 기다림을 뒤로하고, 웅진리에서 정상까지 혼자 걸었습니다. 600미터마다 나타나는 이정표와 아무도 없는 산길의 단풍, 헬기장에서 만난 사람들, 그리고 끝까지 걷지 못한 마지막 3킬로미터의 아쉬움이 오래 남았습니다.
다음 산행은 홍천 공작산으로 향합니다. 공작산은 이름처럼 공작이 날개를 펼친 듯한 산세로 알려진 홍천의 산입니다. 사명산이 기다림을 내려놓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게 한 산이었다면, 공작산에서는 깊은 숲과 수타사 계곡, 홍천의 산줄기 속에서 또 다른 마음의 문장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 산길의 끝에서
양구에 머물던 그 시절, 나는 매일 멈춰버린 현장을 바라보며 기다렸다. 공사가 다시 시작될지, 이대로 끝나버릴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 기다림은 사람을 이상하게 지치게 한다. 몸을 쓰지 않았는데도 피곤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마음이 닳아간다.
그런 날 사명산에 올랐다. 산으로 가기 전 현장에 들러 토종닭 여덟 마리에게 사료를 뿌려주고, 웅진리로 향했다. 다리 앞에서 느슨해진 등산화 끈을 다시 묶었다. 생각해보면 그 끈을 묶던 순간부터 마음도 조금씩 다시 묶이고 있었는지 모른다.
사명산의 길은 처음부터 만만하지 않았다. 그러나 600미터마다 이정표가 나타났다. 그 이정표들은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림에 지쳐 있던 내가, 길 위에서는 누군가에게 기다림을 받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가을 단풍은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개금버섯은 길가에서 눈에 띄었지만, 그날은 버섯을 얻으러 간 날이 아니었다. 산부추의 알싸한 맛을 씹고, 낙엽을 밟으며, 나는 조금씩 현장의 걱정에서 멀어졌다.
정상에서는 사람들을 만났고, 헬기장에서는 막걸리 한잔을 얻어 마셨다. 산에서는 참 이상하게도 처음 만난 사람들과도 금세 가까워진다. 산길에서 나눈 술 한잔은 때로 긴 설명보다 마음을 빨리 풀어준다.
다만 마지막 길을 끝까지 걷지 못한 것은 오래 아쉬움으로 남았다. 임도에서 차를 얻어 타고 내려왔지만, 차는 길을 헤맸고 나는 곧 후회했다. 그냥 걸어 내려올걸. 그 마지막 3킬로미터는 지금도 사명산 어딘가에 남아 있는 듯하다.
사명산은 기다림을 끝내준 산은 아니었다. 현장의 문제가 그날 바로 해결된 것도 아니고, 기다리던 소식이 산 아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러나 산에 있는 동안 나는 기다리지 않았다. 걸었다. 그 차이가 나를 조금 살렸다.
기다림은 사람을 제자리에 묶어두지만, 산길은 사람을 앞으로 가게 한다. 느려도 좋고, 숨이 차도 좋다. 한 걸음씩 옮기다 보면, 마음도 조금씩 이동한다.
그날 사명산에서 나는 기다림을 완전히 내려놓지는 못했다. 다만 그것을 잠시 배낭 한쪽에 넣어두고 걸었다. 그리고 알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에도, 적어도 한 걸음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사명산은 그래서 오래 남았다. 정상보다, 단풍보다, 헬기장의 막걸리보다, 마지막에 걷지 못한 길 하나 때문에 더 오래 남았다.
다시 그 산에 간다면, 이번에는 어느 차에도 오르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3킬로미터까지, 내 두 발로 천천히 걸어 내려올 것이다.
다음 산길에서 다시 만나겠습니다.
⭐ 산바람 · 글바람
멈춰버린 현장을 등지고
사명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공사는 멈췄고,
사람들은 떠났고,
나는 매일
다시 시작된다는 소식만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이 길어질수록
마음도 느슨해졌습니다.
그래서 어느 아침,
등산화 끈을 다시 묶고
웅진리 다리를 건넜습니다.
산으로 가기 전
현장에 들러
토종닭 여덟 마리에게
사료를 뿌려주었습니다.
내가 나타나면
아빠라도 만난 듯
몰려오던 녀석들.
그 작은 생명들만이
멈춰버린 현장에서
아직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사명산 길은
처음부터 가팔랐습니다.
육백 미터마다
이정표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이정표가
조금만 더 오면 된다고,
말없이 기다려주는 것 같았습니다.
길가에는
개금버섯이 보였고,
단풍은
아무도 없는 산길에서
먼저 말을 걸었습니다.
가을은 여기저기
붉은 손을 흔들었지만,
내 마음은
오지 않는 소식만 기다리며
계절의 끝에 서 있었습니다.
정상 가까이에 이르자
사람들이 나타났습니다.
사진을 찍어주고,
헬기장에서는
낯선 이들이 막걸리 한잔을 권했습니다.
산에서는
처음 만난 사람도
술잔 하나를 사이에 두면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가까워집니다.
나는 그 한잔에
조금 풀어졌습니다.
그러나 하산길에서
나는 마지막 길을 걷지 못했습니다.
임도에서 차에 올랐고,
곧 후회했습니다.
그냥 걸어 내려갈걸.
끝까지 걷지 못한
마지막 3킬로미터가
오래 마음에 남았습니다.
사명산은
기다림을 끝내준 산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산에 있는 동안만큼은
나는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걸었습니다.
기다림은
사람을 제자리에 묶어두지만,
산길은
느리더라도 한 걸음씩
앞으로 가게 합니다.
그날 나는 알았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날에도,
적어도 한 걸음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 사명산에 간다면
이번에는 어느 차에도 오르지 않겠습니다.
낙엽 쌓인 마지막 길까지
내 두 발로
천천히 걸어 내려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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