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바람 · 글바람 ㉙」 계방산 산행기, 폭우 속에서 마음을 씻다
| 계방산 정상 |
2009년 7월 19일, 아무 계획 없이 서울을 벗어나 운두령에서 계방산으로 올랐다. 폭우와 안개, 거센 바람 속에서 정상에 섰고,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마음속에 엉켜 있던 것들을 내려놓았다.
산바람이 스쳐 간 자리에는 풍경이 남고,
글바람이 머문 자리에는 기억이 남습니다.
산을 걸으며, 마음에 한 페이지를 적어 내려간 기록.
계방산의 그날 비는 산을 적신 것이 아니라, 오래 엉켜 있던 내 마음을 씻어내고 있었다.
무작정 서울을 벗어나다
토요일 아침이었다. 며칠 동안 복잡하게 얽혀 있던 머릿속을 어떻게 식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생각은 꼬리를 물었고, 마음은 좀처럼 한곳에 머물지 못했다. 이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배낭을 차에 싣고 무조건 서울을 벗어나는 것.
속초로 갈지, 강릉으로 갈지, 아니면 길에서 마음이 닿는 산을 하나 골라 오를지 아무것도 정하지 않았다. 방향은 동쪽이었다. 그저 서울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폭우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가 마음에 걸렸지만, 그마저도 오래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안전한 계획보다 답답한 마음을 흔들어 깨울 무엇인지도 몰랐다.
하늘은 금방이라도 물바가지를 쏟아부을 듯 잔뜩 내려앉아 있었다. 새로 개통된 춘천 방향 고속도로에 들어서며 혼잣말을 했다.
홍천으로 갈까.
그냥 속초까지 가볼까.
망설이다 문득 계방산이 떠올랐다.
계방산. 겨울 눈꽃과 상고대로 더 자주 불리는 산. 해발 1,577m의 높은 산이지만, 운두령에서 오르면 이미 고도가 높아 정상까지의 실제 고도 차이는 생각보다 크지 않은 산. 그날의 나에게는 그 사실이 묘한 위로처럼 다가왔다. 높지만 너무 멀지 않은 산, 힘들지만 오늘 안에 다녀올 수 있을 것 같은 산. 그래서 나는 홍천을 지나 평창과 오대산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 이번 산행 한눈에 보기
🏔 산행지
계방산
📅 산행일
2009년 7월 19일
🥾 산행 코스
운두령 → 전망대 → 계방산 정상 → 운두령
📏 산행 거리
약 8.2km
⏱ 산행 시간
약 2시간 30분
⭐ 난이도
★★★☆☆
운두령의 고도가 높아 정상까지의 고도 차이는 비교적 부담이 덜하지만, 비바람과 안개, 폭우가 겹치면 체감 난도는 크게 올라간다. 여름 산행이라도 방수 재킷과 등산화, 체온 관리가 중요하다.
🌳 산행 환경
운두령 · 여름 숲길 · 전망대 · 안개 · 폭우 · 강풍 · 계방산 정상 · 원점회귀
🏡 숙박
당일 산행 가능. 평창, 홍천, 오대산권 여행과 연계 가능
🚗 이동방법
자가용으로 운두령 접근 후 원점회귀
계방산은 강원도 평창군 용평면 일대에 자리한 산으로, 오대산국립공원에 속해 있다. 운두령에서 오르면 짧은 시간 안에 높은 산의 분위기를 만날 수 있지만, 날씨가 나쁘면 조망보다 바람과 안개가 먼저 사람을 맞이하는 산이기도 하다.
오늘의 시
계방산 / 송현
등에 보따리를 가득 진 사내가 앉아 있다.
함박눈 한 짐, 겨울바람 한 짐,
하늘에 허리를 기대고
팔보다 긴 지팡이 하나 짚은 채
날마다 구름의 일기예보를 그린다.
한 땀 한 땀 이어 붙인 산자락에는
들꽃이 아이처럼 뛰어놀고,
며칠씩 비탈을 걷던 나무들은
마침내 허리를 펴고 일어선다.
그들을 떠나보낸 고갯길 너머
늙은 저녁노을이 손을 내민다.
길 떠난 손주를 기다리다
그 자리에서 굳어버린 할머니처럼
아직도 들려오는 소리.
녹슨 탱크와 비행기는
아랫마을의 사라진 초가를 지키고,
이름 석 자 배우다 떠나간 아이는
어느 산그늘에 잠들었는지.
밤이면 나무들이 모여
낮게 사연을 나누고,
끝나지 않은 이야기는
해마다 들꽃으로 다시 피어난다.
닳아버린 정상석은
그 사연을 아는지 모르는지
산바람을 입에 물고
휘파람만 불어댄다.
두 손을 움켜쥔 채
땅속 깊이 내리꽂힌 계방산.
그 긴 비탈을 돌고 돌아 내려오면
운두령이 허리를 기대고 앉아 있다.
고갯마루 주막 하나
입을 벌린 채 길손을 기다리고,
세월이라는 분장을 얼굴에 바른 주인장은
탁자에 손을 짚고 굽은 허리를 편다.
그 발밑 계곡에는
아직 녹지 않은 얼음창 아래로
물방울 하나씩 맺히고,
고드름을 매단 처마 위로
차가운 연기만 굴뚝을 타고 오른다.
흙벽에 두서없이 매달린 사진들,
눈물 자국에 흐려진 작은 글씨들.
패잔병처럼 줄지어 선 차림표 끝에서
감자전 한 장이
색 바랜 옷을 입고 나를 바라본다.
막걸리 몇 병을 달래었는지
주인장의 흰 소매는 누렇게 젖고,
술기운 오른 운두령도
다시 지게를 지고 헐떡인다.
언제부터였을까.
소설처럼 전해지던 이야기가
전설이 되어 고갯길을 떠도는 것은.
멀뚱히 서 있는 너를
언제까지 바라볼 수 있을까.
운두령,
네가 사라지기 전에
나는 네 오래된 휘파람을
한 번 더 들어야겠다.
구름도 쉬어 간다는 운두령
점점 빗방울이 보이기 시작했다. 폭우 예보 탓인지 도로에는 차량도 드물었다. 운두령으로 오르는 길 역시 고요했다. 마치 산 전체가 다가올 비를 알고 숨을 죽이고 있는 듯했다.
구름도 쉬어 간다는 운두령.
고갯마루에 도착하니 빗방울이 제법 굵어졌다. 길가에는 식당 두 곳이 나란히 붙어 있었고, ‘부녀회관’이라는 간판 아래에서 아주머니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날 혼자 찾아온 등산객이 신기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한 눈치였다.
잠시 뒤 빈 관광버스 한 대가 들어왔다. 산을 넘어오고 있는 일행을 기다리는 차량인 듯했다. 나는 혼자 등산로 입구의 계단을 몇 걸음 올라갔다가 다시 차로 돌아왔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폭우가 오후부터 온다고 했는데, 벌써 시작된 것 같았다. 차 안에 앉아 앞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방울을 한참 바라보았다. 빗방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이상하게도 내게 자꾸 질문을 던지는 것 같았다.
정말 올라갈 거냐고.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고.
십여 분 동안 차 안에서 빗소리와 생각 없는 대화를 나누었다. 산에 오르기 전 가장 긴 시간은 때로 실제 시간이 아니라 마음이 망설이는 시간이다. 길은 눈앞에 있는데, 발이 움직이지 않는 순간. 산보다 먼저 넘어야 하는 것은 내 안의 머뭇거림이었다.
그러다 슬리퍼를 벗었다. 등산 양말을 신고 등산화를 단단히 조였다. 마음이 정해지고 나니 더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다녀오자.
모자를 눌러쓰고 재킷을 걸쳤다. 그리고 다시 계방산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올랐다.
비 오는 산에서 만난 사람들
처음에는 빗방울이 생각보다 거칠지 않았다. 옷자락을 스치는 빗물을 숲이 내뿜는 음이온이라 생각하며 천천히 걸었다. 조금 전 도착한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인지 몇 명의 등산객이 무리 지어 내려왔다.
비 오는 산에서 만나는 사람은 평소보다 더 반갑다.
그들은 이미 산행을 마치고 버스를 타고 돌아갈 사람들이었다. 젖은 모습인데도 함께 걷고 함께 돌아갈 일행이 있다는 것이 조금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 나는 혼자이고 싶어 이곳까지 온 것이 아니었던가.
혼자 산을 걷는 날에는 발소리가 커진다. 평소에는 듣지 못했던 내 숨소리도 선명해지고, 마음속 말들도 자꾸 길 위로 올라온다. 누군가와 함께라면 농담으로 넘겼을 생각들이 혼자일 때는 그대로 나를 따라온다. 그날의 계방산 길도 그랬다. 나는 비를 맞으며 걷고 있었지만, 사실은 내 안의 복잡한 생각들과 함께 걷고 있었다.
깔딱고개를 넘어 한 시간가량 오르니 전망대가 나타났다.
전망대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온 세상이 안개 속에 잠겨 있었다. 비는 아직 견딜 만했지만 바람이 몹시 거셌다. 똑바로 서 있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바람은 온몸을 밀어냈고, 안개는 앞길을 삼켰다. 나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전망대를 뒤로하고 다시 정상으로 향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길
숲길로 들어서자 빗소리가 점점 커졌다. 빗방울이 나뭇잎을 때리는 소리와 바람이 숲을 흔드는 소리가 뒤섞였다. 등산로를 덮은 젖은 풀잎들이 바지와 옷자락을 쓸고 지나갔다. 어느새 비에 젖은 것인지, 풀에 젖은 것인지 구분할 수도 없었다.
산에서 조망이 사라지면 사람은 자기 안쪽을 보게 된다. 멀리 보이는 산줄기도 없고, 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풍경도 없고, 사진으로 남길 만한 장면도 없을 때, 길은 조금 쓸쓸해진다. 하지만 그 쓸쓸함 속에서 오히려 마음이 선명해질 때가 있다.
나는 왜 이 비를 맞으며 걷고 있는가.
그 질문은 계속 따라왔다. 답은 없었다. 다만 발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어쩌면 그게 그날의 답이었는지도 모른다. 머릿속으로는 풀 수 없는 문제라도, 몸으로 걷다 보면 조금씩 느슨해지는 것들이 있다. 산은 생각을 정리해주는 곳이라기보다, 생각이 스스로 지칠 때까지 걷게 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비는 점점 굵어졌고, 바람은 점점 차가워졌다. 여름 산이었지만, 높은 산의 바람은 계절을 쉽게 믿게 하지 않았다. 등산화는 물을 머금기 시작했고, 바지는 무거워졌다. 그래도 이상하게 뒤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정상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폭우 속의 정상
마침내 정상에 도착했다.
하지만 정상석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비와 안개, 바람이 한꺼번에 몰려와 사방이 어지러웠다. 정상에 올라온 것을 축하하는 것인지, 아니면 감히 이곳까지 올라온 나를 시샘하는 것인지, 정상에 도착한 지 채 1분도 되지 않아 비바람이 갑자기 거세졌다.
얼굴에 부딪치는 빗방울이 따갑고 아팠다.
이게 폭우구나.
말로만 듣던 폭우를 온몸으로 실감했다. 겨우 정상석 앞에서 사진 한 장을 남기고 서둘러 하산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렵기보다 마음이 후련했다.
정상에는 도착했다.
오늘 내가 정한 목적은 이루었다.
그 뒤에 만난 폭우는 오히려 선물처럼 느껴졌다. 정상에 오르기도 전에 이 비를 만났다면 돌아갈 것인지, 계속 갈 것인지 수없이 망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정상에 올라선 뒤였다.
이제는 내려가기만 하면 되었다.
쏟아지는 비가 그동안 마음속에 쌓여 있던 답답함까지 함께 씻어내는 것 같았다. 스트레스가 빗물에 녹아 등산로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문득 몇 년 전 지리산 천왕봉에서 겪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정상에 올라서자마자 갑작스러운 비바람이 몰아쳤다.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장터목대피소로 내려가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오늘의 계방산도 그날의 지리산처럼 나를 비와 바람 속에 세워놓고 있었다.
첨벙첨벙 내려오다
등산화 안으로 빗물이 들어왔다. 발을 디딜 때마다 철퍽거렸고, 젖은 등산화는 점점 무거워졌다. 그런데 발걸음은 오히려 가벼웠다.
산에는 아무도 없었다.
정상에서 내려온 지 5분도 되지 않아 좁은 등산로 위로 작은 물길이 생겨났다. 나는 그 물길을 피하지 않고 일부러 밟으며 내려왔다.
첨벙첨벙.
어린아이처럼 물을 밟고, 혼자 소리도 질렀다. 떠들어도 아무도 듣지 않았다. 웃어도 누구 하나 이상하게 바라보지 않았다. 비와 숲과 바람만이 있는 나 혼자만의 세상이었다.
옷은 이미 흠뻑 젖었다. 모자는 금방이라도 바람에 날아갈 듯했고, 고어텍스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가 젖지는 않을까 걱정도 되었다.
그런데도 나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신나게 산을 내려왔다.
다시 만난 전망대는 이제 폭우 속에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조금 전까지 희미하게나마 형태가 보이던 시설물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 비가 무섭다고 하는구나.
잠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수백 년 동안 수많은 비와 바람을 견뎌온 계방산의 숲과 길이 오늘 하루의 폭우에도 굳건히 버틸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오늘의 비 정도는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등산로 곳곳에 물줄기가 생기고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폭우는 산길을 작은 계곡으로 바꾸어놓고 있었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정상에서 만난 비였기 때문이다. 정상에 도착한 뒤 쏟아진 폭우라서 오히려 더 행복한 산행이었는지도 모른다. 중간에서 이런 비를 만났다면 정상보다 하산을 먼저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목적을 이루고 만난 폭우는 시련이라기보다 축하처럼 느껴졌다.
운두령으로 돌아오다
운두령으로 내려오니 오후 2시 30분이었다. 정상까지 다녀오는 데 2시간 30분이 걸렸다.
애초에 계획도 없었던 산행이었다. 서울을 떠날 때만 해도 내가 어디로 갈지조차 몰랐다. 속초로 갈 수도 있었고, 강릉으로 갈 수도 있었다. 그러다 마음이 닿은 곳이 계방산이었다.
뱃살을 빼겠다며 운동을 시작한 지도 한 달쯤 되었지만, 아직 빠지지 않은 배를 이끌고 시험 삼아 오른 산행이기도 했다. 산은 때때로 사람의 뱃살까지 핑계 삼아 불러낸다. 그 핑계가 우습지만, 우스운 핑계라도 사람을 길 위에 세워준다면 나쁘지 않다.
몸은 흠뻑 젖었지만 마음은 한결 가벼워졌다.
운두령 식당 아주머니는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이 비에 산을 다녀와요?”
걱정과 잔소리가 반씩 섞인 목소리였다. 나는 식당에 앉아 메밀묵을 주문했다. 산에서 온몸으로 비를 맞았으니 무엇이든 맛있게 먹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막상 음식 앞에 앉으니 생각보다 잘 넘어가지 않았다.
남은 음식은 포장해 차에 실었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언제 다시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을까.
비를 피해 산을 내려온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나 자신을 놓아버리고 내려온 하루였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답답함을 산속에서 마음껏 소리 지르고, 쏟아지는 비에 모두 씻어버린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가끔 산에 미치나 보다
사람들은 왜 위험한 날 산에 오르느냐고 묻겠지만, 가끔은 안전한 일상 속에서 더 숨이 막힐 때가 있다. 물론 폭우 속 산행은 조심해야 한다. 무모함을 자랑할 일은 아니다. 산은 늘 사람보다 크고, 날씨는 사람의 마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어떤 날에는 산이 아니면 풀리지 않는 마음이 있다. 책상 앞에서는 풀리지 않고, 술자리에서도 풀리지 않고, 누구에게 말해도 설명되지 않는 답답함. 그럴 때 산은 사람을 비바람 속에 세워놓고 묻는다.
무엇이 그렇게 답답했느냐고.
무엇을 그토록 붙잡고 있었느냐고.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하지만 산을 내려올 때는 이미 괜찮아져 있었다.
계방산의 폭우는 나를 혼내기도 했고, 안아주기도 했다. 바람은 나를 밀어냈지만, 숲은 나를 받아주었다. 비는 온몸을 적셨지만, 마음속 묵은 먼지까지 함께 씻어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산에 미치나 보다.
산은 조용히 말을 건다. 때로는 폭우와 바람으로, 마음속에 쌓인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고.
에필로그|비가 마음을 씻어준 날
계방산에 오른 그날은 처음부터 계획된 산행이 아니었다. 서울을 벗어나고 싶었고, 머릿속에 엉킨 생각들을 어디에든 내려놓고 싶었다. 속초로 갈지, 강릉으로 갈지, 홍천으로 갈지 정하지 못한 채 동쪽으로 달리다가 문득 계방산을 떠올렸다.
운두령에 도착했을 때 비는 이미 내리고 있었다. 등산로 입구 계단을 몇 걸음 올랐다가 다시 차로 돌아와 한참을 망설였다. 정말 올라갈 것인가. 지금이라도 돌아갈 것인가. 빗방울은 앞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며 말없이 물었다.
나는 결국 등산화를 신었다. 다녀오자. 그 한마디로 마음은 정해졌다.
전망대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정상에서는 정상석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비와 안개와 바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은 따갑고 아팠다. 그런데 이상하게 두렵기보다 후련했다. 이미 정상에 도착한 뒤였기 때문이다.
내려오는 길, 등산로는 작은 계곡이 되었다. 나는 물길을 피하지 않고 일부러 밟으며 내려왔다. 첨벙첨벙. 어린아이처럼 물을 밟고, 아무도 없는 숲에서 소리를 질렀다. 비와 숲과 바람만이 있는 나 혼자만의 세상이었다.
그날 계방산은 멋진 조망을 보여주지 않았다. 푸른 능선도, 맑은 하늘도, 멀리 펼쳐진 산줄기도 없었다. 대신 폭우를 주었다. 그리고 그 폭우는 내가 오래 붙잡고 있던 답답함을 씻어주었다.
산은 늘 아름다운 풍경으로만 사람을 위로하지 않는다. 어떤 날에는 거칠게 몰아치는 비로, 몸을 밀어내는 바람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로 사람을 깨운다. 계방산의 그날 비는 산을 적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씻어낸 비였다.
운두령으로 내려와 식당에 앉았을 때, 아주머니는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비에 산을 다녀와요?”
그 말이 맞았다. 미련한 산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의 나에게는 꼭 필요한 산행이었다. 몸은 흠뻑 젖었지만 마음은 오래간만에 가벼웠다.
나는 그날 알았다.
비를 맞아야 씻겨나가는 마음도 있다는 것을.
🌿 이 산행을 준비하는 분들을 위해
계방산은 운두령에서 정상까지 비교적 짧게 다녀올 수 있는 높은 산이다. 운두령의 해발고도가 이미 높기 때문에 정상까지 실제 고도 차이는 크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해발 1,500m가 넘는 산인 만큼 날씨 변화가 빠르고, 비바람이나 안개가 있으면 체감 난도는 크게 올라간다.
여름 산행이라도 비가 오면 체온이 떨어질 수 있고, 젖은 풀과 흙길, 물길이 된 등산로 때문에 미끄럼 위험이 커진다. 폭우 예보가 있을 때는 무리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산행 전에는 반드시 기상 상황과 탐방로 통제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 좋다.
산행 준비 메모
첫째, 비 예보가 있으면 산행 여부를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폭우 속 산행은 조망보다 안전이 먼저다. 정상보다 무사히 내려오는 것이 더 중요하다.
둘째, 운두령 코스가 짧다고 가볍게 보면 안 된다.
높은 산의 바람과 안개는 생각보다 빠르게 산행 분위기를 바꾼다.
셋째, 방수 장비와 여벌 옷이 필요하다.
비에 젖은 상태로 오래 있으면 여름에도 체온이 떨어질 수 있다.
🌿 관련 사이트 및 여행 정보
① 국립공원공단 오대산국립공원
계방산 코스, 오대산국립공원 탐방 정보, 입산시간과 탐방로 안내를 확인할 수 있다.
② 평창문화관광 계방산
계방산 운두령 코스와 평창 지역 여행 정보를 함께 살펴볼 수 있다.
③ 평창문화관광
평창의 산, 계곡, 전통시장, 숙박과 여행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④ 홍천문화관광
운두령과 가까운 홍천 방면 여행지, 숙박, 먹거리 정보를 함께 참고할 수 있다.
⑤ 대한민국 구석구석 평창 여행
평창과 오대산권 여행 정보를 폭넓게 찾아볼 수 있다.
🌿 계방산 산행 준비물 체크리스트
□ 방수 재킷
□ 배낭 방수 커버
□ 접지력 좋은 등산화
□ 여벌 양말
□ 여벌 옷
□ 모자 또는 방수 모자
□ 스틱
□ 비닐봉지 또는 방수팩
□ 휴대전화 방수 보관
□ 충분한 식수
□ 간단한 행동식
□ 기상 예보 확인
□ 탐방로 통제 확인
□ 정상보다 하산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
🌿 추천 숙박과 주변 여행
🏡 평창·오대산권
계방산 운두령 산행은 평창과 오대산권 여행과 함께 묶기 좋다. 월정사, 오대산 선재길, 진부와 대관령 일대 여행을 함께 계획하면 산행 뒤 일정이 한결 풍성해진다.
🏡 홍천권
운두령 접근 방향에 따라 홍천권 숙박도 고려할 수 있다. 홍천 방면에서 이동하면 계방산과 홍천의 계곡, 휴양림, 전통시장 여행을 함께 연결하기 좋다.
🌄 이전 산행 이야기 다시보기
「산바람 · 글바람 ㉘」 덕유산 무박 산행기, 별빛 따라 향적봉에 오르다
덕유산에서는 설 연휴 끝자락 밤 10시에 서울을 출발해 새벽 구천동에서 백련사를 지나 향적봉에 올랐습니다. 상고대는 만나지 못했고 일출도 반쪽이었지만, 백련사 가는 길의 별빛과 정상에서 끓인 라면, 막걸리 한 잔이 오래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덕유산이 별빛 하나만으로 충분했던 무박 산행이었다면, 계방산은 폭우 속에서 마음을 씻어낸 산행이었습니다. 하나는 밤하늘이 열어준 산이었고, 하나는 빗물이 오래 막혀 있던 마음을 풀어준 산이었습니다.
🌄 다음 산행 이야기
「산바람 · 글바람 ㉚」 양구 사명산 산행기
계방산에서는 아무 계획 없이 서울을 벗어나 운두령에 닿았고, 폭우와 안개 속에서 정상에 올랐습니다. 멋진 조망은 없었지만,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마음속 답답함을 씻어낸 하루였습니다.
다음 산행은 양구 사명산으로 향합니다. 사명산은 강원도 양구의 산줄기 위에서 소양호와 파로호, 깊은 산골의 고요를 함께 품은 산입니다. 계방산이 폭우 속에서 마음을 씻어준 산이었다면, 사명산에서는 물안개와 능선, 그리고 북쪽 산하의 서늘한 침묵 속에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 산길의 끝에서
계방산에 오른 그날은 처음부터 계획된 산행이 아니었다. 서울을 벗어나고 싶었고, 머릿속에 엉킨 생각들을 어디에든 내려놓고 싶었다. 속초로 갈지, 강릉으로 갈지, 홍천으로 갈지 정하지 못한 채 동쪽으로 달리다가 문득 계방산을 떠올렸다.
운두령에 도착했을 때 비는 이미 내리고 있었다. 등산로 입구 계단을 몇 걸음 올랐다가 다시 차로 돌아와 한참을 망설였다. 정말 올라갈 것인가. 지금이라도 돌아갈 것인가. 빗방울은 앞 유리창을 타고 흘러내리며 말없이 물었다.
나는 결국 등산화를 신었다. 다녀오자. 그 한마디로 마음은 정해졌다.
전망대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정상에서는 정상석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비와 안개와 바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은 따갑고 아팠다. 그런데 이상하게 두렵기보다 후련했다. 이미 정상에 도착한 뒤였기 때문이다.
내려오는 길, 등산로는 작은 계곡이 되었다. 나는 물길을 피하지 않고 일부러 밟으며 내려왔다. 첨벙첨벙. 어린아이처럼 물을 밟고, 아무도 없는 숲에서 소리를 질렀다. 비와 숲과 바람만이 있는 나 혼자만의 세상이었다.
그날 계방산은 멋진 조망을 보여주지 않았다. 푸른 능선도, 맑은 하늘도, 멀리 펼쳐진 산줄기도 없었다. 대신 폭우를 주었다. 그리고 그 폭우는 내가 오래 붙잡고 있던 답답함을 씻어주었다.
산은 늘 아름다운 풍경으로만 사람을 위로하지 않는다. 어떤 날에는 거칠게 몰아치는 비로, 몸을 밀어내는 바람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로 사람을 깨운다. 계방산의 그날 비는 산을 적신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씻어낸 비였다.
운두령으로 내려와 식당에 앉았을 때, 아주머니는 걱정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 비에 산을 다녀와요?”
그 말이 맞았다. 미련한 산행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의 나에게는 꼭 필요한 산행이었다. 몸은 흠뻑 젖었지만 마음은 오래간만에 가벼웠다.
나는 그날 알았다.
비를 맞아야 씻겨나가는 마음도 있다는 것을.
다음 산길에서 다시 만나겠습니다.
⭐ 산바람 · 글바람
서울을 벗어나고 싶었습니다.
속초로 갈지,
강릉으로 갈지,
홍천으로 갈지
아무것도 정하지 못한 채
나는 동쪽으로 달렸습니다.
하늘은 낮게 내려앉고,
비는 곧 쏟아질 듯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계방산이 떠올랐습니다.
구름도 쉬어 간다는 운두령.
고갯마루에 닿았을 때
비는 이미 내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계단을 몇 걸음 올랐다가
다시 차로 돌아와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정말 올라갈 거냐고,
지금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고,
빗방울은 앞 유리창을 타고
말없이 물었습니다.
그러다 나는
슬리퍼를 벗고
등산화를 신었습니다.
다녀오자.
그 한마디로
마음은 정해졌습니다.
전망대에 올라섰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안개는 세상을 삼키고,
바람은 온몸을 밀어냈습니다.
그래도 나는
정상으로 향했습니다.
마침내 계방산 정상에 섰을 때
비바람은 갑자기 거세졌습니다.
정상석조차 흐릿했고,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은
따갑고 아팠습니다.
이게 폭우구나.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렵기보다 후련했습니다.
정상에는 도착했습니다.
오늘 내가 정한 목적은
이미 이루어진 뒤였습니다.
이제는 내려가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하산길의 등산로는
작은 계곡이 되었습니다.
나는 물길을 피하지 않고
일부러 밟으며 내려왔습니다.
첨벙첨벙.
어린아이처럼
물을 밟고,
아무도 없는 숲에서
혼자 소리도 질렀습니다.
비와 숲과 바람만이 있는
나 혼자만의 세상이었습니다.
그날 계방산은
푸른 조망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맑은 하늘도,
멀리 이어지는 산줄기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대신 폭우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 폭우는
오래 엉켜 있던 내 마음을
씻어주었습니다.
산은 때로
아름다운 풍경으로 위로하지 않습니다.
거친 비로,
차가운 바람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안개로
사람을 깨우기도 합니다.
운두령으로 내려왔을 때
몸은 흠뻑 젖어 있었지만,
마음은 오래간만에
가벼워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날 알았습니다.
비를 맞아야
씻겨나가는 마음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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