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바람 · 글바람 ㉓」 불암산 산행기, 두 번째 눈이 산에게 남긴 말

 

눈 덮인 불암산 나뭇가지 사이로 서울과 남양주 도심이 내려다보이는 겨울 설경
불암산 능선 위에 두 번째 눈이 내려앉았다. 눈을 머금은 나뭇가지 사이로 도시가 희미하게 내려다보이고, 가까운 산도 겨울에는 낯선 얼굴로 사람의 걸음을 늦추게 한다.


서울에 두 번째 눈이 내린 날, 백세문에서 시작해 불암산 정상으로 올랐다. 초입은 맨살을 드러냈지만 중턱부터 산은 흰 눈을 품고 있었고, 익숙한 산길은 미끄러운 바위와 눈 속에서 다시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산바람이 스쳐 간 자리에는 풍경이 남고,
글바람이 머문 자리에는 기억이 남습니다.
산을 걸으며, 마음에 한 페이지를 적어 내려간 기록.

서울에 두 번째 눈이 내린 날, 불암산은 익숙한 길도 다시 처음처럼 걸어야 한다고 조용히 일러주었다.


서울에 두 번째 눈이 내렸다

서울에 두 번째 눈이 내렸다. 포천에는 많은 눈이 왔다지만, 도심의 길가는 비에 씻긴 흔적만 남아 있었다. 하루 종일 내리던 비를 보며 나는 산을 떠올렸다. 비가 도시의 언어라면, 눈은 산의 언어일 것이다. 불암산은 이미 그 언어로 하루를 쓰고 있을 것 같았다.

백세문에서 산행을 시작했다. 초입의 바닥은 뜻밖에도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산은 늘 이렇게 사람을 안심시킨다. 아무 일 없다는 듯 품을 열었다가, 중턱에 이르러서야 속내를 보여준다. 한 시간을 오르자 흰 기운이 발밑에 내려앉기 시작했고, 곧 산은 제 몸을 온통 눈으로 덮었다.

아직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눈이었다. 발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설경 앞에서 사람은 저절로 속도를 늦춘다. 부드러워 보이는 눈은 경계를 풀어놓게 만들지만, 그 안에는 미끄러짐이 숨어 있다. 눈은 아름답지만, 겨울 산에서 아름다운 것들은 대개 조심하라는 말을 함께 품고 있다.


🌿 이번 산행 한눈에 보기

🏔 산행지
서울·남양주 불암산

📅 산행 시기
서울에 두 번째 눈이 내린 겨울날

🥾 주요 코스
백세문 → 불암산 능선길 → 거북바위 → 불암산 정상 → 석천암 → 불암사 방향 하산

📏 산행 거리
약 3시간 남짓 걸은 겨울 산행

산행 시간
약 3시간 전후

난이도
★★★☆☆

평소에는 비교적 익숙한 근교 산행지이지만, 눈과 습기를 머금은 바위길에서는 체감 난도가 크게 올라감

🌳 산행 환경
도심 근교 산행 · 바위능선 · 눈길 · 거북바위 · 정상 조망 · 석천암 · 불암사 하산길

🏡 숙박
서울·남양주권 당일 산행지로 숙박 없이 다녀오기 좋음

🚇 이동방법
서울 노원구와 남양주 별내 방면에서 접근 가능하며, 대중교통과 자가용 모두 이용 가능

불암산은 서울 노원구와 경기도 남양주시 경계에 있는 산으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불암산의 높이를 509.7m로 설명한다. 불암산이라는 이름은 큰 바위 봉우리가 송낙을 쓴 부처의 형상을 닮았다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서울 공식 관광정보도 불암산이 노원구와 남양주시에 걸쳐 있으며, 정상의 큰 바위가 송낙을 쓴 부처님의 모습을 닮아 불암산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소개한다.


불암산이라는 이름 앞에서

불암산은 크기만으로 사람을 압도하는 산은 아니다. 그러나 멀리서 바라보면 바위산 특유의 단단한 얼굴이 또렷하다. 지리산처럼 장대한 능선으로 사람을 오래 붙잡는 산은 아니지만, 도시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쉽게 마음을 놓지 못하게 하는 산이다. 가까운 산이라고 해서 가벼운 산은 아니다.

정상부의 바위가 부처의 형상을 닮았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면, 불암산이라는 이름은 조금 더 조용히 다가온다. 바위가 부처를 닮았다는 것은 그 모양만을 말하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래 앉아 바람을 맞고, 세월을 견디고, 수많은 사람들의 오르내림을 말없이 바라보는 모습이 어쩌면 부처를 닮았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산은 자주 찾는 사람에게도 늘 처음처럼 자신을 낮추라고 말한다.

서울둘레길 안내에서도 불암산은 산꼭대기의 바위가 부처님을 닮아 불암산이라 불렸고, 암자와 사찰이 많은 산으로 소개된다. 또한 풍수지리적 지명으로 ‘필암산’이라 불리기도 했다는 설명이 전해진다. 산 이름 하나에도 자연의 모양, 사람들의 믿음, 오래된 상상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오늘의 시

불암산 / 송현

금강산 가던 신선이
바위 한 자락 내려놓고 간 산.

전쟁의 밤에는
학도병들이 호랑이 되어
능선을 지켰다.

전설과 역사가
한 산에서 숨을 쉬고,

오늘도 불암산은
세파에 지친 사람들의 가슴에
맑은 바람을 불어넣는다.


 

전설과 역사가 한 산에서 숨을 쉬다

불암산에는 전설처럼 부드러운 이야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산은 때때로 사람의 고단한 역사를 함께 품는다. 불암산을 말할 때 빠질 수 없는 이름 가운데 하나가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다. 지역문화 자료는 불암산이 6·25전쟁 당시 육사생도들로 구성된 ‘호랑이 유격대’가 활동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고 설명한다.

시 속에서 “학도병들이 호랑이 되어 능선을 지켰다”고 쓴 것은 그래서 더욱 오래 마음에 남는다. 산은 바람과 나무와 바위만 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두려움, 누군가의 결심, 돌아오지 못한 젊은 시간도 함께 품는다. 우리가 오늘 산책하듯 걷는 능선 위에도 한때는 삶과 죽음이 가까이 지나갔던 시간이 있었다.

그렇다고 이 산행이 무거운 역사 이야기로만 흐르지는 않는다. 불암산은 도시 가까운 산이다. 사람들은 운동화를 신고 오르고, 가족과 함께 걷고, 정상에서 사진을 찍는다. 하지만 가끔은 그 가벼운 발걸음 아래에 오래된 이야기들이 함께 놓여 있다는 것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산을 안다는 것은 정상의 높이만 아는 일이 아니라, 그 산이 품고 있는 기억까지 천천히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눈은 부드럽게 내려와 단단히 시험한다

산은 늘 조용한 방식으로 사람을 시험한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눈은 깊어졌다. 방심은 늘 사소한 순간에 찾아온다. 한 번의 미끄러짐, 엉덩방아. 스틱을 꺼내 다시 꺼냇지만, 이번에는 무릎이 먼저 반응했다. 몸이 보내는 짧은 경고였다.

통증이 심했다. 아마도 눈 속에 숨어 있던 돌덩이나 바위였을 것이다. 신발을 탓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날의 눈은 습기를 머금은 채 쉽게 미끄러졌다. 이유보다 결과가 먼저 다가왔다. 산에서는 넘어지고 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내가 어디를 덜 보았는지, 어느 순간 마음이 느슨해졌는지, 왜 익숙하다는 이유로 준비를 늦췄는지.

아이젠을 착용하고 마지막 구간을 올랐다. 자주 찾던 산이었기에 더욱 조심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익숙함은 때로 가장 얇은 보호장비가 된다. 처음 가는 산에서는 누구나 조심한다. 길을 확인하고, 발밑을 살피고, 몸의 균형에 신경 쓴다. 그런데 자주 찾던 산에서는 이상하게 마음이 먼저 편해진다. 그 편안함이 때로는 가장 위험한 방심이 된다.

부상이라 부르기엔 애매했지만, 몸은 분명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산이 내게 말하는 듯했다. “너는 나를 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같은 산도 계절이 바뀌면 다른 산이 된다. 같은 길도 비가 오고 눈이 내리면 다른 길이 된다. 같은 사람도 세월이 지나면 다른 몸으로 산 앞에 선다.


거북바위를 지나 정상으로

거북바위를 지나 정상으로 향했다. 불암산의 바위들은 낮은 산이라는 생각을 자주 잊게 만든다. 서울시 공원 안내는 불암산이 서울과 남양주의 경계를 이루며 수락산과 이웃하고, 능선이 기암으로 이어지는 산이라고 소개한다. 또한 봄에는 철쭉이 화원을 연상케 하며, 암벽등산 훈련 코스로도 찾는 이들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날의 불암산은 철쭉의 산이 아니라 눈의 산이었다. 바위 위에 내려앉은 눈은 산을 부드럽게 보이게 했지만, 발밑의 감각은 오히려 날카로웠다. 눈은 바위를 감추고, 얼음은 길의 표정을 바꾼다. 겨울 산에서 풍경은 눈으로 보는 것이고, 안전은 발로 읽는 것이다.

정상에 가까워질수록 도시가 뒤로 물러나는 느낌이 들었다. 아주 먼 산에 온 것도 아닌데, 눈 덮인 바위와 차가운 바람 사이에 서면 도시는 잠시 다른 세계가 된다. 길 아래에는 여전히 아파트와 도로와 사람들의 하루가 있겠지만, 산 위에서는 그 모든 소리가 한 겹 낮아진다. 가까운 산이 주는 위로는 바로 그런 것이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잠시 다른 호흡으로 나를 데려가 준다는 것.


익숙한 산 앞에서 배운 겸손

불암산은 자주 찾던 산이었다. 그래서 마음 한쪽에는 “이 정도쯤이야” 하는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산은 그 생각을 곧바로 바로잡았다. 한 번 미끄러지고, 무릎에 통증이 오고, 아이젠을 꺼내 신는 사이에 나는 다시 초보자가 되었다. 산 앞에서 초보자가 된다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오래 산을 다닌 사람일수록 가끔은 다시 초보자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산은 실수를 크게 꾸짖지 않는다. 다만 몸으로 기억하게 한다. 오늘 발을 어디에 놓아야 하는지, 속도를 어디서 줄여야 하는지, 익숙한 길에서도 왜 장비를 챙겨야 하는지. 그날의 불암산은 말 대신 무릎에 작은 통증 하나를 남겼다. 그리고 그 통증은 산행이 끝난 뒤에도 오래 생각을 끌고 갔다.

나는 그 통증이 싫지만은 않았다. 물론 아픈 것은 반갑지 않다. 그러나 그 통증 덕분에 나는 그날의 불암산을 더 오래 기억하게 되었다. 모든 산행이 아름다운 조망이나 정상 사진으로만 남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산행은 작은 실수와 몸의 경고로 남고, 어떤 산행은 조심해야 할 이유를 다시 가르쳐준 하루로 남는다.


석천암과 불암사 쪽으로 내려오며

정상을 지나 석천암, 불암사 쪽으로 하산했다. 내려오는 길의 산은 처음과 다르지 않게 고요했다. 세 시간 남짓한 산행 끝에 무릎을 부여잡고 절뚝이며 내려왔지만, 마음은 오히려 차분해졌다. 산은 내가 아프다고 해서 더 소란스러워지지 않았고, 내가 조심스럽게 내려간다고 해서 특별히 길을 넓혀주지도 않았다. 다만 처음부터 그랬듯, 자기 자리에 있었다.

불암사라는 이름을 지나며 다시 불암산이라는 이름을 생각했다. 산과 절, 바위와 사람, 눈과 통증이 한날의 기억 속에 함께 놓였다. 산은 늘 좋은 것만 주지는 않는다. 때로는 불편함을 주고, 아픔을 주고, 준비가 부족했던 나를 보게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지나고 나면 이상하게 마음이 가라앉는다. 산에서 배운 것은 대개 크게 외치는 말이 아니라, 오래 남는 작은 감각이기 때문이다.

그날 불암산은 내게 정상의 기쁨보다 하산의 조심스러움을 더 오래 남겼다. 올라갈 때는 눈의 아름다움을 보았고, 내려올 때는 그 아름다움 속에 숨어 있던 위험을 보았다. 같은 눈이었지만, 오를 때와 내려올 때의 눈은 달랐다. 삶도 그렇다. 어떤 일은 시작할 때는 선물처럼 보이지만, 지나고 나서야 그 안에 담긴 경고를 알게 된다.


에필로그|익숙함 앞에서는 언제나 겸손할 것

불암산은 그날 말 대신 몸으로 가르쳐주었다.

익숙함 앞에서는 언제나 겸손할 것. 그리고 산은 늘 그 겸손의 크기만큼 길을 내어준다는 것. 나는 그 말을 무릎의 통증으로 배웠다. 자주 찾던 산이라고 해서 오늘의 산까지 모두 아는 것은 아니었다. 어제의 길을 안다고 해서 오늘의 눈길까지 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서울에 내린 두 번째 눈은 도시에서는 비에 씻겨 사라졌지만, 산에서는 조용히 남아 있었다. 그 눈은 불암산의 바위 위에 내려앉아 사람의 발걸음을 늦추고, 방심한 마음을 붙잡고, 다시 조심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눈은 아름다웠고, 길은 미끄러웠다. 그 둘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절뚝이며 내려왔지만 마음은 이상하게 차분했다. 산행이 늘 멋진 풍경과 가벼운 걸음으로만 끝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조금의 통증과 함께 오래 남는 하루도 있다. 불암산은 그런 하루였다. 익숙한 산이 낯선 얼굴로 다가와, 나를 다시 처음처럼 걷게 한 날이었다.


🌿 이 산행을 준비하는 분들을 위해

불암산은 서울 노원구와 경기도 남양주시 경계에 있는 산으로, 접근성이 좋아 당일 산행지로 많이 찾는 산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불암산의 높이를 509.7m로 소개하고, 정상부의 큰 바위가 송낙을 쓴 부처의 형상을 닮아 불암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설명한다.

서울시 공원 안내는 불암산이 수락산과 이웃하고 있으며, 능선이 기암으로 이어지고 봄철 철쭉이 아름다운 산이라고 소개한다. 정상에서는 북한산과 도봉산 방향 조망도 볼 수 있다고 안내한다. 겨울철 눈이 내린 뒤에는 낮은 산이라도 바위와 계단, 그늘진 길에 결빙이 남을 수 있으므로 아이젠과 스틱을 준비하는 것이 좋다.


산행 준비 메모

첫째, 익숙한 산일수록 장비를 가볍게 보지 않는 것이 좋다. 불암산은 근교 산이지만 바위길이 많아 눈이 내린 뒤에는 미끄러질 수 있다. 아이젠, 스틱, 장갑은 짧은 산행에서도 도움이 된다.

둘째, 초입이 맨땅이라고 해서 정상부도 안전하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겨울 산은 고도와 방향, 그늘에 따라 길 상태가 크게 달라진다. 초입에는 눈이 없어도 중턱과 정상부에는 잔설과 얼음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셋째, 통증이 오면 무리하지 않는 것이 산을 오래 다니는 방법이다. 산행에서 중요한 것은 정상에 서는 것보다 안전하게 내려오는 일이다. 내려오는 길까지 산행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아야 한다.


🌿 관련 사이트 및 여행 정보

① 서울 공식 관광정보 불암산

👉 서울 공식 관광정보 불암산 안내 바로가기

불암산의 위치와 이름 유래, 산행지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② 서울의 공원 불암산도시자연공원

👉 서울의 공원 불암산도시자연공원 바로가기

불암산도시자연공원 개요와 주요 풍경, 산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③ 서울둘레길 불암산 코스

👉 서울둘레길 불암산 코스 바로가기

불암산 주변 둘레길과 코스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④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이야기

👉 지역문화 이야기 불암산 호랑이 유격대 바로가기

6·25전쟁 당시 불암산과 관련된 호랑이 유격대 이야기를 살펴볼 수 있다.


🌿 불암산 겨울 산행 준비물 체크리스트

아이젠 또는 체인젠
스틱
방수·방풍 재킷
보온 장갑
접지력 좋은 등산화
따뜻한 물
간단한 행동식
무릎 보호대
비상약과 파스
보조배터리
눈길에서 속도를 낮추는 마음
익숙한 산도 처음처럼 대하는 겸손


🌿 추천 숙박과 주변 여행

🏡 서울 노원권

불암산은 당일 산행으로 충분히 다녀올 수 있는 산이지만, 서울 여행과 함께 묶는다면 노원권 숙박을 고려할 수 있다. 불암산, 수락산, 서울둘레길을 함께 계획하기 좋다.

👉 서울 공식 관광정보 바로가기

🏡 남양주 별내권

남양주 별내 방면에서 접근한다면 별내권 숙박이나 카페 거리, 인근 산책 코스를 함께 계획할 수 있다. 불암산과 수락산을 연계해 근교 산행 여행으로 묶기에도 좋다.

👉 남양주시 문화관광 바로가기


🌄 이전 산행 이야기 다시보기

「산바람 · 글바람 ㉒」 지리산 화대종주, 나에게 묻다

지리산 화대종주에서는 화엄사의 새벽 어둠에서 시작해 대원사의 계곡 물소리까지, 긴 능선을 따라 몸과 마음의 시간을 통과했습니다. 노고단과 삼도봉, 연하천과 장터목, 천왕봉과 중봉을 지나며 지리산은 끝내 답을 주지 않았지만, 다시 걸을 수 있는 질문 하나를 남겨주었습니다.

지리산이 “너는 아직 살아 있는가”라고 물었던 산이었다면, 불암산은 그 질문 뒤에 아주 가까운 곳에서 다시 묻는 산이었습니다. “익숙한 길 앞에서도 너는 여전히 조심하고 있는가.” 긴 종주 뒤에 만난 짧은 눈길은, 산의 크기보다 마음의 자세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일깨워주었습니다.


🌄 다음 산행 이야기

「산바람 · 글바람 ㉔」 문경 조령산 산행기

불암산에서는 서울에 내린 두 번째 눈을 따라 백세문에서 정상으로 올랐습니다. 초입은 맨살을 드러냈지만 중턱부터 산은 흰 눈으로 덮여 있었고,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길은 미끄러운 바위와 숨은 돌로 다시 조심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날의 불암산은 가까운 산일수록 더 겸손해야 한다는 것을 몸으로 가르쳐주었습니다.

다음에는 문경의 조령산으로 향합니다. 조령산은 문경새재와 백두대간의 산줄기를 떠올리게 하는 이름입니다. 불암산이 도시 곁의 바위산에서 익숙함을 경계하게 한 산이었다면, 조령산에서는 옛 고개를 넘던 사람들의 발자국과 오늘의 걸음이 만나는 길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 산길의 끝에서

서울에 두 번째 눈이 내린 날, 나는 불암산에 올랐다. 도시의 길은 비에 씻겨 있었지만, 산은 이미 눈의 언어로 하루를 쓰고 있었다. 백세문에서 시작한 길은 처음에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맨살을 드러냈고, 나는 조금 안심했다. 그러나 산은 언제나 중턱쯤에서 자기 속내를 보여준다.

한 시간을 오르자 눈이 나타났고, 곧 산은 제 몸을 흰빛으로 덮었다. 발자국 하나 없는 눈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안에는 미끄러짐이 숨어 있었다. 한 번의 방심, 한 번의 미끄러짐, 그리고 무릎에 남은 통증. 그날 불암산은 풍경보다 먼저 몸으로 말을 걸었다.

자주 찾던 산이었다. 그래서 더 조심하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익숙함은 때로 가장 얇은 보호장비가 된다. 산을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 산은 오늘의 자신을 새롭게 보여준다. 같은 산도 계절이 바뀌면 다른 산이 되고, 같은 길도 눈이 내리면 처음 걷는 길이 된다.

거북바위를 지나 정상에 섰고, 석천암과 불암사 쪽으로 내려왔다. 세 시간 남짓한 산행 끝에 무릎을 부여잡고 절뚝이며 내려왔지만, 마음은 오히려 차분했다. 불암산은 그날 말 대신 몸으로 가르쳐주었다. 익숙함 앞에서는 언제나 겸손할 것. 산은 늘 그 겸손의 크기만큼 길을 내어준다는 것.

조금의 통증과 함께, 오래 남을 하루였다.


⭐ 산바람 · 글바람

서울에
두 번째 눈이 내렸습니다.

도시의 길은
비에 씻겨 있었지만,

산은 이미
눈의 언어로
하루를 쓰고 있었습니다.

백세문에서 시작한 길은
처음에는 맨살을 드러내며
나를 안심시켰습니다.

그러나 산은
늘 그렇듯
중턱에 이르러서야
속내를 보여주었습니다.

흰 눈이
발밑에 내려앉고,

아직 사람의 때가 묻지 않은 길이
조용히 펼쳐졌습니다.

눈은 부드러웠지만
그 안에는 미끄러짐이 숨어 있었습니다.

한 번의 방심,
한 번의 미끄러짐,

그리고 무릎이 보내온
짧은 경고.

자주 찾던 산이라
더 조심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익숙함은 때로
가장 얇은 보호장비가 됩니다.

거북바위를 지나
정상에 서고,

석천암과 불암사 쪽으로
천천히 내려오며

나는 그날
불암산이 건넨 말을
몸으로 들었습니다.

익숙한 길 앞에서도
겸손할 것.

산은 늘
그 겸손의 크기만큼
길을 내어준다는 것.

조금의 통증과 함께
오래 남을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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