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바람 · 글바람 ⑱」 덕적도 비조봉 산행기, 시간을 건너는 섬의 능선
소야교 위로 운무가 걷히고 윤슬이 번지는 덕적도 바다 풍경, 다리와 바다가 함께 빛나는 섬 여행 장면
덕적도와 소야도를 잇는 소야교 위로 운무가 걷히고, 바다에는 윤슬이 번진다. 돌아갈 시간을 알면서도 조금 더 머물고 싶게 만드는 섬의 오후다.
산바람이 스쳐 간 자리에는 풍경이 남고,
글바람이 머문 자리에는 기억이 남습니다.
산을 걸으며, 마음에 한 페이지를 적어 내려간 기록.
덕적도 비조봉은 바다를 내려다보는 산이면서, 오래전의 나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시간의 언덕이었다.
바다를 건너 다시 만난 젊은 날의 섬
덕적도는 내게 단순한 섬이 아니다. 오래된 시간의 결이 남아 있는 곳이다. 손으로 쓸어보면 아직도 거칠게 느껴질 것 같은 기억들이 그곳에 남아 있다. 젊은 시절, 가벼운 발걸음으로 떠났던 길. 그리고 어린 두 아들과 함께 텐트 속에서 보냈던 밤. 바람이 천막을 두드리던 소리와 아이들이 잠들기 전까지 끝없이 이어가던 이야기. 바깥은 어두웠지만 텐트 안에는 웃음소리가 있었고, 특별한 것을 하지 않아도 하루가 충분했던 시절이었다.
그 장면들은 이제 바다 안개처럼 희미하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하다가도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진다. 그래도 어떤 기억은 사라지는 대신 사람을 다시 그곳으로 부른다. 오늘은 그 부름을 핑계 삼아 덕적도로 향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 한 번쯤 다시 만나야 할 것 같은 시간이 그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 이번 산행 한눈에 보기
🏝 여행지
인천 옹진군 덕적도 · 비조봉
📅 시기
바다 안개와 윤슬이 교차하던 날
🥾 주요 동선
인천 연안여객터미널 → 덕적도 → 비조봉 산행 → 소야교 일대 → 해안과 갯벌 풍경 → 귀항
📏 산행 거리
비조봉 중심의 섬 산행과 섬 여행을 함께한 일정
⏱ 소요 시간
배 시간 포함 하루 일정
⭐ 난이도
★★★☆☆
🌊 여행 환경
여객선 이동 · 섬 산행 · 숲길 · 능선 조망 · 바다 전망 · 소야교 · 해변과 갯벌
🏕 기억의 포인트
젊은 날의 덕적도, 두 아들과의 텐트 밤, 비조봉 능선에서 바라본 서해와 섬들
🚢 이동 방법
인천 연안여객터미널에서 여객선 이용
덕적도는 인천 옹진군에 속한 섬으로, 덕적군도의 중심이 되는 섬이다. 비조봉은 해발 292m의 높지 않은 산이지만, 정상과 능선에서 바라보는 바다 풍경이 특히 아름답다. 소야교 개통 이후에는 덕적도와 소야도를 차량과 도보로 오갈 수 있게 되어 섬 여행의 폭도 한층 넓어졌다.
섬으로 가는 날은 일찍 시작된다
하필이면 오늘 친구 결혼식이 두 건이나 겹쳤다. 마음 한편이 계속 걸렸다. 그러나 섬으로 향하는 길은 육지 여행과 조금 다르다. 버스를 놓치면 다음 버스를 타면 되고, 전철을 놓치면 다음 열차를 기다리면 된다. 하지만 섬으로 가는 배는 그렇지 않다. 한 번 놓치면 하루의 리듬 전체가 달라진다.
전날 섬에 들어가 머물지 않는 이상 아침 배를 타는 일은 늘 조금 버겁다. 늦잠 끝에 허둥지둥 집을 나섰다. 버스와 전철을 갈아타며 마음까지 분주해졌다. 운 좋게 동인천행 전철에 몸을 실었지만 휴일 아침의 객실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등산배낭을 멘 사람들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떤 사람은 깊은 산으로 가고, 어떤 사람은 섬으로 가며, 또 어떤 사람은 이름 모를 들길을 걸으러 갈 것이다. 목적지는 달라도 그들의 걸음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부지런하다는 것.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행도 산행도 결국 부지런한 사람의 몫이라고.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갈 수 없고, 마음이 있어도 아침에 일어나 신발을 신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건강이 먼저라는 생각이 자주 든다. 보고 싶은 산이 남아 있고, 다시 가보고 싶은 섬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내 두 다리다.
배를 기다리는 시간
어느새 바다 쪽에 닿았다. 생각은 아직 집을 떠나던 순간에 머물러 있는데 몸은 이미 바다를 향하고 있었다. 섬답게 배를 기다리는 시간은 길었다. 기다림이 길어지자 결혼식 생각이 다시 났다. ‘지금쯤 식이 시작됐겠구나.’ 그러다가 마음을 정리했다. 오늘 하루는 덕적도에 내어주기로 하자. 살다 보면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 다른 하나를 내려놓아야 하는 날이 있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다. 어디에 있어도 아쉬움은 남는다. 그렇다면 오늘은 바다 쪽을 바라보자.
선착장에는 배낭을 멘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삼삼오오 나누는 수다와 웃음, 김밥 봉지를 든 사람, 창가 자리를 먼저 잡으려는 사람, 낚싯대를 챙겨온 사람. 그들의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여객선은 이미 이동 수단이 아니었다. 여행은 배가 출항하기 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큰물섬으로
덕적도라는 이름에는 오래된 시간이 들어 있다. 예부터 ‘큰물섬’ 또는 ‘큰물이’에서 비롯된 이름이라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깊고 큰 바다에 놓인 섬이라는 의미가 덕물도를 거쳐 오늘의 덕적도로 이어졌다고 한다. 조선 숙종 때는 덕적진이 설치되어 서해의 물길을 지키던 역사도 남아 있다.
큰물섬. 그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섬은 작아 보여도 그 둘레의 바다는 크다. 사람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겉으로는 한 사람의 짧은 생이지만, 그 안에는 가족과 친구, 사랑과 이별, 성공과 실패, 수많은 기억이라는 큰물이 출렁인다. 나는 그 큰물 위를 건너 다시 오래전의 나를 만나러 가고 있었다.
안개 속 인천대교를 지나
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도시는 조금씩 뒤로 밀렸다. 안개 속에 서 있는 인천대교가 보였다. 거대한 다리는 아무 말 없이 바다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저 다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출발과 돌아옴을 보았을까. 설레는 사람, 떠나는 사람, 돌아오는 사람, 누군가를 배웅한 사람. 다리는 그 모든 사연을 들었겠지만 어느 하나 붙잡지 않았을 것이다.
배는 천천히 바다를 갈랐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잦아들자 물결의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 위로 기억들이 하나둘 올라왔다. 텐트 속에서 들리던 바람. 아이들의 웃음. 잠들기 전까지 이어졌던 이야기.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던 밤. 그때의 나는 지금보다 가벼웠을까. 아니면 오히려 더 많이 흔들리고 있었을까. 기억은 언제나 좋은 쪽으로 남는다. 당시에는 힘들었던 일도 세월이 지나면 부드러워지고, 당시에는 평범했던 하루가 나중에는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귀한 장면이 된다. 그래서 기억은 아름답고, 그래서 더 아프다.
배 뒤에 남은 시간
배의 꽁무니를 따라 하얀 포말이 길게 이어졌다. 마치 떨어지지 못한 시간이 배를 뒤따라오는 것 같았다. 나는 한동안 그 흔적을 바라보았다. 배가 지나가면 물은 다시 합쳐진다. 그러나 완전히 같은 바다가 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사람의 삶도 비슷하다. 누군가 지나간 자리, 어떤 사건이 지나간 자리, 사랑과 이별이 지나간 자리에는 한동안 흔적이 남는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아도 마음 아래에서는 아직 파문이 퍼지고 있을 때가 있다.
디젤 엔진의 퉁퉁거리는 소리에 익숙해질 즈음 갈매기들이 배 주위를 돌았다. 마치 섬에서 먼저 보낸 마중꾼 같았다. 그리고 마침내 덕적도에 닿았다.
익숙해서 더 낯선 섬
배에서 내리는 순간, 바다도 섬도 그대로인 것 같은데 이상하게 모든 것이 낯설었다. 익숙한데 낯선 풍경. 오래전 기억과 지금의 풍경이 정확히 겹치지 않았다. 도시에서나 보던 공사 펜스도 눈에 들어왔다. 변화의 물결은 섬도 비켜가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섬만 변한 것은 아닐 것이다. 나도 변했다. 젊은 시절 이곳을 찾던 사람과 어린 두 아들의 손을 잡고 텐트를 치던 사람, 그리고 오늘 혼자 다시 이 섬에 선 사람은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지만 같은 사람은 아닐지도 모른다. 시간은 장소도 바꾸지만 그곳을 바라보는 눈도 바꾼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이 지금은 보이고, 당시에는 중요했던 것이 이제는 별것 아닌 일이 되기도 한다.
나는 천천히 걸었다. 굳이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오늘은 어디를 몇 시까지 가야 한다는 목적보다 이 섬에 다시 와 있다는 사실 하나로 충분했다.
덕적도의 산, 비조봉으로
덕적도를 떠올리면 많은 사람은 바다를 먼저 생각한다. 그러나 덕적도에는 섬의 바다를 높은 곳에서 바라볼 수 있는 산도 있다. 비조봉이다. 해발 292m. 숫자만 보면 작다. 그러나 섬의 산은 높이만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바다에서 바로 시작하는 산은 낮아도 오름이 또렷하고, 무엇보다 능선에 서면 육지의 산과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육지의 산 정상에서는 산 너머 또 다른 산이 이어지지만, 섬의 산에 오르면 능선이 끝나는 곳마다 바다가 있고, 바다 위에는 다시 작은 섬들이 떠 있다. 산과 바다가 서로의 끝을 만들어주는 풍경. 그것이 섬 산행의 매력이다.
나는 비조봉으로 향했다.
산을 오르며 옛날의 나를 만나다
숲길에 들어서자 바다의 냄새가 조금 멀어졌다. 섬의 산이라 해도 숲 안으로 들어서면 평범한 산길처럼 느껴진다. 나무 사이로 바람이 불고, 발밑에는 흙과 돌이 놓여 있다. 하지만 가끔 숲이 열릴 때마다 파란 바다가 나타난다. 그 순간 다시 알게 된다. 나는 지금 섬 위의 산을 걷고 있다는 것을.
비조봉을 오르며 오래전의 나를 생각했다. 젊은 시절의 나는 아마 이런 길을 더 빨리 걸었을 것이다. 정상까지 얼마나 걸리는지 재고, 앞사람을 따라잡으며, 쉬는 시간도 아까워했을 것이다. 지금은 다르다. 숨이 차면 멈춘다. 나무 사이로 바다가 보이면 오래 바라본다. 그러다 옛날 생각이 나면 그냥 생각 속에 잠시 머문다.
나이 든다는 것은 걷는 속도만 느려지는 일이 아닌가 보다. 기억으로 자꾸 돌아가는 일. 현재의 길 위에서 과거의 풍경을 함께 보는 일. 그래서 어떤 산행은 실제보다 더 길다. 몸은 5킬로미터를 걸어도 마음은 수십 년을 건너가기 때문이다. 비조봉으로 가는 길이 그랬다.
바다를 내려다보는 자리
능선에 올라서자 시야가 열렸다. 서해의 바다가 펼쳐졌다. 멀고 가까운 섬들이 물 위에 떠 있었다. 지도에서는 각각 다른 이름을 가진 섬들이다. 소야도, 굴업도, 문갑도, 그리고 덕적군도를 이루는 여러 섬들. 높은 곳에서 바라보니 섬은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서로 떨어져 있지만 같은 바다 위에 있었다.
사람도 그런 것일까. 각자의 삶이라는 섬에서 살아가지만 사실은 하나의 큰 바다 안에 있는 것. 젊었을 때 함께 여행했던 사람도, 이제 연락이 뜸해진 친구도, 어린아이였던 두 아들도, 지금은 각자의 길을 걷고 있지만 내 기억 속의 바다에서는 여전히 함께 떠 있었다.
나는 비조봉 능선에서 오랫동안 바다를 바라보았다. 아마 산을 오르기 위해 섬에 온 것인지, 섬을 내려다보기 위해 산에 오른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그 자리에 서니 오래전 덕적도의 시간이 조금 더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소야교, 두 섬 사이에 놓인 시간
섬을 걷다 보면 소야교를 만나게 된다. 덕적도와 소야도를 잇는 이 다리는 두 섬 사이의 생활과 이동 방식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예전에는 배를 타야만 건널 수 있었던 바다 위에 이제 다리가 놓였다.
나는 그 다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다리는 단순히 두 땅을 잇는 구조물이 아니다. 시간도 잇는다. 어제와 오늘, 고립과 연결, 기다림과 이동. 소야교를 건너며 나 역시 또 하나의 기억 속으로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운무에 잠긴 길 위에서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이상하게도 몸이 느려질수록 생각은 또렷해졌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 여행에는 늘 그런 순간이 있다. 떠나야 하기에 머무는 시간이 더 소중해지는 순간.
운무가 걷히고 윤슬이 나타나다
다리 옆으로 바다를 따라 길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운무가 바다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섬도, 바다도, 먼 풍경도 모두 희미했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며 운무가 조금씩 걷혔다. 그 아래에서 윤슬이 나타났다. 물 위에 수천 개의 작은 빛이 흔들렸다. 마치 바다가 오래 숨겨둔 보석을 한꺼번에 꺼내놓은 것 같았다.
빛은 잡으려 하면 사라지고, 바라볼 때만 존재했다. 삶의 좋은 순간도 그렇다. 당시에는 평범해서 모르고 지나갔는데 세월이 지난 뒤에야 그때가 얼마나 빛나던 시간이었는지 알게 된다. 어린 아들과 텐트에서 보낸 밤도 그랬다. 당시에는 아이들 챙기느라 정신없었을 것이다. 짐을 나르고, 밥을 먹이고, 잠자리를 정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기억에 남은 것은 고생이 아니다. 바람 소리, 아이들의 웃음, 작은 텐트 안의 온기. 삶에서 윤슬은 늘 지나간 뒤에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나무 숲을 지나 바다로
소나무 숲길을 따라 걸었다. 섬의 소나무는 육지의 나무와 조금 다르게 느껴진다. 바닷바람을 오래 맞아서일까. 곧게만 자라지 않고, 바람이 온 방향을 몸으로 기억한 듯 기울어져 있는 나무도 있었다. 그러나 뿌리는 단단해 보였다. 바람이 강한 곳에서는 곧게 서는 것보다 버티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사람도 그렇다. 평탄한 삶에서는 반듯하게 살아가는 것이 쉬울 수 있다. 그러나 바람 많은 시간을 지나온 사람은 조금 기울어 있을 수도 있다. 상처가 있고, 말수가 줄어들고, 한쪽으로 몸이 굽을 수도 있다. 그래도 뿌리를 놓지 않고 살아왔다면 그 삶 역시 충분히 아름답다.
숲길을 지나자 어느새 백사장이 펼쳐졌다. 갯벌이 보이고, 바다가 바위 사이로 천천히 밀려왔다. 바다를 안고 있는 바위들은 아무 말 없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나는 한동안 걸음을 멈추었다. 오늘 하루가 참 길었다. 아침의 늦잠, 버스와 전철, 배를 기다린 시간, 바다를 건넌 시간, 비조봉의 숲길, 소야교, 윤슬, 소나무 숲과 갯벌. 그 모든 것이 길기만 하던 하루를 조용히 채워주고 있었다.
비조봉에서 바라본 시간
비조봉이라는 이름을 마음속으로 다시 불러보았다. 높지 않은 산. 하지만 섬 전체를 조금 다른 눈으로 바라보게 하는 산. 사람도 높은 자리에 올라야만 많은 것을 보는 것은 아닐 것이다. 조금만 삶에서 떨어져 바라보는 자리, 그 정도면 충분할 때가 있다.
비조봉에 올라 바다를 내려다보니 젊었던 날의 내가 멀리 보이는 것 같았다. 가벼운 배낭을 메고 섬을 걷던 사람. 두 어린 아들과 텐트를 치던 사람. 바람이 불어도 내일 걱정보다 오늘 밤의 웃음이 더 중요했던 사람. 그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사라진 것은 아닐 것이다. 지금의 나 안에 여전히 남아 있을 것이다. 다만 세월이 여러 겹 쌓여 쉽게 보이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사람은 가끔 옛 장소를 찾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장소를 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 남아 있는 옛날의 자신을 만나기 위해서.
섬은 기다려주고 있었다
덕적도는 나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섬은 수많은 사람을 맞고 또 보냈다. 내가 젊은 날 이곳을 찾았다는 것도, 두 아들과 텐트에서 잤다는 것도 섬에게는 특별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나는 섬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면 충분했다. 사랑하는 장소란 그 장소가 나를 기억하는 곳이 아니라 내가 그곳에서의 나를 잊지 못하는 곳인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 속에 예전의 나와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지금의 내가 함께 섞이는 것 같았다. 시간은 흘렀지만 완전히 사라진 것은 없었다. 어떤 것은 사진 속에 남고, 어떤 것은 사람의 말 속에 남고, 어떤 것은 섬의 바람을 한 번 맞는 순간 다시 살아난다.
🍂 오늘의 시
덕적도, 시간의 갈피 / 송현
총각 시절 가벼운 발걸음과
아이들의 웃음소리 머물던 텐트 위로
오늘도 바다 안개는 내려앉는다.
결혼식의 소란도 잊은 채
배를 타고 과거의 물결을 건너가면
변한 건 섬인가, 나인가.
낯선 듯 익숙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소야교 너머로 새로운 기억이 잇닿을 때
길게 늘어진 하루의 품에 안겨
비로소 오늘을 천천히 걷는다.
돌아가야 할 시간이 가까워질 때
섬 여행의 아쉬움은 늘 배 시간에서 시작된다.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 앞에 서 있어도 돌아갈 배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시계를 바라보는 횟수가 늘어난다. ‘이제 가야 하나.’ 그 생각이 들면 풍경은 오히려 더 선명해진다.
사람은 참 이상하다. 영원히 머물 수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모르고, 떠날 시간이 다가오면 갑자기 모든 것이 아깝다. 삶도 그렇지 않을까. 젊을 때는 시간이 무한한 줄 알았다. 다음에 하면 되고, 다음에 만나면 되고, 다음에 여행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월을 살다 보면 모든 것에 다음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래서 지금의 여행은 예전과 조금 다르다. 더 많이 보려고 서두르는 대신 한 장면을 오래 보게 된다. 더 많은 장소에 가려 하기보다 한 번의 바람을 기억하려 한다. 덕적도에서의 오늘도 그랬다.
시간을 건너는 길
돌아가는 길에 다시 바다를 바라보았다. 비조봉은 섬 안쪽에서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 것이다. 소야교는 두 섬 사이를 이어주고, 소나무는 바닷바람을 견디며 서 있을 것이다. 갯벌에는 다시 물이 들어오고, 백사장에는 누군가 새로운 발자국을 남길 것이다. 나는 떠난다. 그러나 섬은 남는다.
예전에도 그랬다. 젊은 내가 떠난 뒤에도 덕적도는 남아 있었고, 아이들이 자란 뒤에도 바다는 계속 파도를 밀어 올렸을 것이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 위로가 된다. 모든 것이 함께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 떠나도 장소는 남고, 시간이 지나도 기억은 어떤 모양으로든 남아 있다.
나는 비조봉을 생각했다. 산을 오르는 일은 높은 곳에 서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날은 달랐다. 나는 비조봉에서 바다를 본 것이 아니라 내가 건너온 시간을 내려다보았는지도 모른다. 젊은 날의 바다, 아이들과 함께한 밤, 오늘 아침 허둥지둥 집을 나선 나. 그 모든 시간이 하나의 풍경 안에 있었다.
덕적도는 내게 묻지 않았다
덕적도는 내게 묻지 않았다. 왜 이제야 다시 왔느냐고.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고. 젊은 날의 너와 지금의 너는 얼마나 달라졌느냐고. 덕적도는 묻지 않았다. 그저 바람을 내어주고, 비조봉의 길을 열어주고, 바다 위에 윤슬을 한 번 펼쳐 보였을 뿐이다. 나는 그 무심함이 좋았다.
오래된 친구도 때로는 그렇게 만난다. 밀린 이야기를 모두 하지 않아도 된다.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래, 잘 살아 있었구나.’ 알게 되는 사람이 있다. 덕적도가 내게 그런 곳이었다.
나는 오늘 이 섬에서 무엇을 얻었는지 정확히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알 것 같다. 지나간 시간은 돌아오지 않지만 사라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 어떤 시간은 바람이 되고, 어떤 시간은 바다 냄새가 되며, 어떤 시간은 한 산의 능선 위에 오래 남는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길을 떠나는지도 모른다. 새로운 곳을 보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오래된 자신을 다시 만나기 위해서.
덕적도를 떠나는 배 위에서 나는 다시 하얀 포말을 바라본다. 배는 앞으로 가고 물결은 뒤로 길게 이어진다. 마치 시간이 말하는 것 같다. 돌아갈 수는 없다고. 그러나 잊을 필요도 없다고.
나는 비조봉을 뒤로하고 섬을 떠난다. 그런데 이상하다. 떠나고 있는데도 조금은 돌아온 것 같은 마음이 든다. 아마 덕적도 어딘가에 남겨두고 갔던 오래전의 나를 잠시 다시 만나고 왔기 때문일 것이다. 바다는 시간을 건너게 했고, 비조봉은 지나온 날들을 내려다보게 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세월은 사람을 멀리 데려가지만, 어떤 장소는 오래 기다렸다가 다시 그 사람을 옛날의 자신에게 데려다주기도 한다는 것을.
덕적도는 내게 그런 섬이었다. 멀리 떠나온 줄 알았는데 결국 오래전의 나에게로 돌아가게 하는 섬. 그날 나는 비조봉을 오른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가 살아온 시간을 천천히 건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에필로그|비조봉에서 내려다본 것은 바다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덕적도는 바다를 건너야 만날 수 있는 섬이다. 그만큼 쉽게 닿지 않고, 그래서 더 오래 마음에 남는다. 젊은 날의 기억과 두 아들과의 텐트 밤, 바람 소리와 웃음소리,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충분했던 한때가 그 섬에 묻혀 있었다.
이번 여행은 풍경을 보러 간 길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그 풍경 속에 남아 있는 옛날의 나를 만나러 간 길이었다. 비조봉은 높지 않았다. 하지만 그 능선에 서면 섬들이 보였고, 바다가 열렸고, 그 바다 위로 오래전의 시간이 함께 떠올랐다.
소야교 위의 윤슬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졌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오래 기억에 남았다. 윤슬이 늘 그 자리에 있었다면 그렇게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의 시간도 그렇다. 사라지기 때문에 더 귀하고, 지나간 뒤에야 비로소 얼마나 빛났는지 알게 된다.
덕적도는 내게 묻지 않았다. 왜 늦었느냐고, 왜 이제 왔느냐고, 얼마나 변했느냐고. 그저 바람을 내어주고, 비조봉의 숲길을 열어주고, 윤슬 한 번 보여주었을 뿐이다. 그 무심함 덕분에 나는 오래전의 나를 조용히 만나고 돌아올 수 있었다.
비조봉에서 내려다본 것은 바다가 아니라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내 안 어딘가에서 바다 냄새처럼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 이 산행을 준비하는 분들을 위해
덕적도 비조봉은 높이만 보면 가벼운 산행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섬 산행 특유의 오르막과 능선길이 분명한 곳이다. 여객선 시간에 맞춰 움직여야 하므로 산행 속도보다도 전체 일정 관리가 더 중요하다. 특히 배를 놓치면 귀가 일정이 크게 달라질 수 있으니, 섬에서는 늘 돌아갈 시간까지 함께 생각해야 한다.
비조봉은 서해와 덕적군도의 섬들을 바라보기 좋은 산이다. 날씨가 맑으면 조망이 시원하게 열리고, 안개가 있더라도 운무가 걷히는 과정과 윤슬이 만들어내는 풍경이 또 다른 매력을 준다. 소야교까지 함께 둘러보면 섬 산행과 섬 여행의 분위기를 함께 느끼기에 좋다.
🌿 섬 산행 준비 메모
덕적도는 산과 바다가 함께 있는 여행지다. 산행 장비만 생각하지 말고, 여객선 이동과 해안 바람, 햇볕까지 함께 고려하는 것이 좋다.
배 시간 확인은 필수다. 섬 여행은 ‘얼마나 더 볼 것인가’보다 ‘언제 돌아가야 하는가’가 훨씬 중요할 때가 많다. 산행 전에 반드시 배 시간과 선착장 이동 시간을 확인해 두는 것이 좋다.
🌿 관련 사이트 및 여행 정보
🌿 ① 덕적도 관광 정보
👉 인천투어 덕적도 바로가기
덕적도와 비조봉, 소야교, 섬 여행 코스 등 인천 섬 관광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 ② 옹진군 관광 안내
👉 옹진군 문화관광 바로가기
덕적군도, 소야도, 굴업도 등 옹진군 섬 여행 정보와 지역 안내를 확인할 수 있다.
🌿 ③ 여객선 예매 안내
👉 가보고 싶은 섬 / 연안여객선 예매 바로가기
인천 연안여객터미널 출발 덕적도행 여객선 시간과 예매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 ④ 인천 연안여객터미널 안내
👉 인천항 여객터미널 안내 바로가기
승선 위치와 터미널 이용 정보를 함께 확인할 수 있다.
🌿 덕적도 비조봉 준비물 체크리스트
□ 여객선 예매 확인
□ 신분증
□ 접지력 좋은 등산화
□ 가벼운 배낭
□ 바람막이 재킷
□ 모자와 선글라스
□ 식수와 간단한 행동식
□ 보조배터리
□ 배 시간 메모
□ 조금 천천히 걸을 마음
🌿 추천 숙소
🏡 덕적도 선착장 주변 민박·펜션
당일 일정이 빠듯하다면 덕적도에서 1박을 고려해도 좋다. 섬에서 하루를 더 머물면 비조봉 산행뿐 아니라 해변과 일몰, 아침 바다까지 여유 있게 만날 수 있다.
🏡 소야도 연계 숙소
소야교를 건너 소야도까지 함께 둘러볼 계획이라면 소야도 쪽 숙소도 좋은 선택이 될 수 있다. 다리 개통 이후 이동이 한결 편해져 섬 안의 여행 반경이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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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바람 · 글바람 ⑰」 경주 남산 산행기, 천년의 신라를 따라 걷다
경주 남산에서는 삼릉계곡의 마애불과 석불, 금오봉의 바람과 오래된 석탑을 만나며 천년의 신라를 따라 걸었습니다. 정상보다 먼저 유적이 말을 걸어왔고, 바위에 새겨진 마음들이 긴 세월을 건너 오늘의 우리에게도 조용히 닿을 수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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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바람 · 글바람 ⑲」 수락산 산행기
덕적도 비조봉에서는 바다를 내려다보며 지나온 시간을 건넜습니다. 섬은 말이 없었고, 비조봉은 높지 않았지만 오래전의 나를 다시 바라보게 하는 산이었습니다.
다음에는 다시 육지의 산으로 돌아갑니다. 바닷바람 대신 바위능선의 바람을 맞으며, 서울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묵직한 기운을 품고 있는 수락산을 걸어보려 합니다. 섬에서 시간을 내려다보았다면, 수락산에서는 도시 곁에 서 있는 산의 오래된 표정과 다시 마주하게 될 것 같습니다.
🍃 산길의 끝에서
덕적도는 오랜만에 다시 만난 섬이었다.
젊은 날의 발걸음과
두 아들의 웃음이 머물던 텐트 밤,
그 모든 시간이 바다 안개처럼
희미하게 남아 있는 곳.
나는 비조봉에 올랐다.
섬의 산은 높지 않았지만,
능선이 끝나는 곳마다 바다가 있었고
바다 위에는 다시 작은 섬들이 떠 있었다.
그 풍경 앞에서
나는 바다를 본 것이 아니라
내가 건너온 시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소야교 위로 운무가 걷히고
윤슬이 나타났을 때,
나는 알았다.
삶의 빛나는 순간은
늘 그때는 모르고 지나가며,
세월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눈부시게 떠오른다는 것을.
덕적도는
왜 이제야 왔느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바람을 내어주고,
비조봉의 길을 열어주고,
바다 위에 빛 한 줄기를 펼쳐 보였을 뿐이다.
그 무심함 덕분에
나는 오래전의 나를
조용히 다시 만나고 돌아올 수 있었다.
섬은 기다려주고 있었다.
사람은 떠나도 장소는 남고,
시간은 지나도 기억은 어떤 모양으로든 남는다.
그날 나는 비조봉을 오른 것이 아니라,
어쩌면 내가 살아온 시간을
천천히 건너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다음 산길에서 다시 만나겠습니다.
산바람 · 글바람
덕적도는
내게 단순한 섬이 아니었습니다.
젊은 날의 발걸음,
두 아들과 함께한 텐트 밤,
바람이 천막을 두드리던 소리와
잠들기 전까지 이어지던 웃음이
아직도 그 바다 어딘가에 남아 있는 것 같았습니다.
비조봉은 높지 않았지만
그 산에 오르자
섬 전체가 조금 다른 얼굴로 보였습니다.
능선이 끝나는 곳마다 바다가 있었고,
바다 위에는 다시 작은 섬들이 떠 있었습니다.
나는 그 풍경을 보며
섬을 내려다본 것이 아니라
내가 건너온 시간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소야교 위로 운무가 걷히고
윤슬이 번질 때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빛나는 순간은
대개 지나간 뒤에야 보인다는 것을.
덕적도는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왜 이제야 왔느냐고도,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고도 묻지 않았습니다.
그저 바람을 내어주고,
비조봉의 길을 열어주고,
바다 위에 빛 한 번 펼쳐 보였을 뿐입니다.
그 무심함이 좋았습니다.
오래된 친구처럼,
밀린 이야기를 다 하지 않아도
‘그래, 잘 살아 있었구나’
알게 되는 만남이 있듯이
덕적도는 내게 그런 섬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섬을 다녀온 것이 아니라
오래전의 나를 잠시 다시 만나고 돌아왔는지도 모릅니다.
바다는 시간을 건너게 했고,
비조봉은 지나온 날들을 내려다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습니다.
세월은 사람을 멀리 데려가지만,
어떤 장소는 오래 기다렸다가
다시 그 사람을 옛날의 자신에게 데려다준다는 것을.
산바람 · 글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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