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바람 · 글바람 ⑮」 포천 백운산 눈꽃산행, 한북정맥의 겨울을 걷다
| 한북정맥 능선에는 상고대가 피어 있었고, 사라지는 눈꽃 앞에서 오래전 걷던 젊은 날의 산길을 다시 떠올렸다. |
광덕고개에서 백운산으로 방향을 바꿔 오른 겨울 산행. 한북정맥 능선에는 상고대가 피어 있었고, 사라지는 눈꽃 앞에서 오래전 걷던 젊은 날의 산길을 다시 떠올렸다.
가장 찬란한 것은 오래 머물지 않았지만, 사라진 자리에는 오래 바라본 사람의 마음이 남았다.
광덕산 대신 백운산으로
삼한사온이 번갈아 얼굴을 내미는 겨울이었다. 며칠 춥다가 조금 풀리고, 이제 봄 쪽으로 계절이 기우나 싶으면 다시 찬바람이 내려왔다.
그런 겨울날, 포천 백운산을 찾았다.
처음부터 백운산을 오르려고 집을 나선 것은 아니었다. 광덕고개에서 광덕산으로 오를 생각이었다.
그런데 광덕고개에 서자 마음이 달라졌다.
산에서는 가끔 이런 일이 있다. 집을 나설 때 정해놓은 길이 있는데도, 막상 들머리에 서면 전혀 다른 방향에서 마음을 부르는 길이 생긴다.
그날이 그랬다.
광덕고개의 찬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칼날처럼 아프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서늘했다. 날에 베인 것이 아니라 오래된 시간에 베인 느낌이었다.
고개 너머로 이어지는 능선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그래. 오늘은 저쪽으로 가자.
그렇게 광덕산 대신 백운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산은 이미 다른 길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 이번 산행 한눈에 보기
🏔 산행지
경기도 포천시 이동면 백운산
📅 산행 시기
겨울, 상고대와 눈꽃이 피어 있던 날
🥾 주요 코스
광덕고개 → 백운산 방향 한북정맥 능선 → 상고대 숲길 → 백운산 일대 → 원점 또는 연계 하산
📏 산행 거리
광덕고개 원점회귀 또는 도마치봉·국망봉 연계 여부에 따라 달라짐
⏱ 산행 시간
눈길 상태와 적설량에 따라 크게 달라지므로 여유 있게 계획
⭐ 난이도
★★★☆☆~★★★★☆
광덕고개에서 시작하면 접근은 좋지만, 겨울철 적설과 결빙, 강풍에 따라 체감 난이도가 높아짐
🌳 산행 환경
고갯길 · 한북정맥 능선 · 눈길 · 상고대 · 조망 능선 · 겨울 숲
🏡 주변 여행
백운계곡 · 포천 이동갈비촌 · 산정호수 · 포천아트밸리 연계 가능
🚗 이동 방법
자가용 또는 포천 이동·광덕고개 방면 대중교통 연계
백운계곡은 광덕산과 백운산 정상에서 서쪽으로 흘러내리는 맑은 물이 모여 이룬 골짜기로, 포천시 문화관광 안내에서는 약 10km 길이의 계곡과 기암괴석이 어우러진 곳으로 소개한다. 백운산 산행과 함께 백운계곡, 이동갈비촌을 연계하면 포천 이동면의 산과 음식 문화를 함께 만날 수 있다.
다시 만난 한북정맥
광덕고개에서 백운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낯선 길이 아니었다.
한북정맥.
백두대간에서 갈라져 북쪽 산줄기를 이루며 내려온 거대한 산맥의 한 부분이다.
나는 오래전에 이 길을 종주하며 걸었다. 그때의 기억은 이제 희미하다. 몇 시에 출발했는지, 누구와 함께 걸었는지, 어느 봉우리에서 밥을 먹었는지는 선명하지 않다.
그런데 산길에는 묘한 힘이 있다.
머리로는 잊은 기억을 발바닥은 기억한다.
눈 위에 발을 올려놓는 순간, 오래전의 길들이 하나둘 살아났다.
광덕산.
백운산.
도마치봉.
국망봉.
강씨봉.
청계산.
운악산.
수원산.
죽엽산을 지나 서울의 북쪽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한북정맥을 걷던 시절에는 지도 한 장과 나침반을 들고 능선을 찾아다니기도 했다. 요즘처럼 휴대전화 하나면 자신의 위치와 남은 거리까지 알려주던 때가 아니었다. 갈림길에 서면 한동안 지도를 펼쳐놓고 산의 모양을 살폈다.
잘못된 길로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는 날도 있었다.
그때의 나는 앞으로만 걸었다. 지나온 길보다 남은 길이 궁금했다. 오늘 몇 킬로미터를 더 가야 하는지, 다음 봉우리는 얼마나 높은지, 해가 지기 전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가 중요했다.
그런데 지금의 나는 자꾸 뒤를 돌아본다.
내가 이곳을 언제 지나갔던가.
그 시절에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 길을 걸었을까.
같은 능선인데, 걷는 방향은 달라져 있었다.
아니, 발은 같은 방향으로 걷고 있어도 마음은 자꾸 과거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겨울이 먼저 피워놓은 꽃
계단을 오르자 풍경이 갑자기 달라졌다.
불과 몇 걸음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겨울 숲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세상이 단숨에 흰색으로 변했다.
눈 위에 다시 눈이 쌓이고, 나무마다 하얀 설화가 피어 있었다.
처음에는 눈꽃이라 생각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가지마다 얼음 결정이 촘촘하게 붙어 있었다.
상고대였다.
높은 산 정상이나 긴 능선을 걸은 끝에서나 만날 것이라 생각했던 상고대를 산행의 시작부터 만났다. 그 순간 조금 당황했다. 좋은 선물을 너무 일찍 받은 사람처럼 마음이 급해졌다.
산행을 시작했을 뿐인데 오늘 산행의 절정을 먼저 만나버린 것 같았다.
나뭇가지 하나하나가 흰 산호초처럼 변해 있었다. 키 작은 관목도, 마른 풀잎도, 소나무 끝의 가는 솔잎도 모두 겨울의 결정으로 감싸여 있었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작은 얼음 알갱이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누군가 밤새 산 전체에 흰 붓질을 해놓은 것 같았다.
산은 높이를 묻지 않고 먼저 계절의 마음을 내어놓고 있었다.
나는 속도를 늦췄다.
아니, 늦출 수밖에 없었다.
이런 풍경 앞에서 서둘러 지나가는 것은 산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능선 위에 걸린 옛 이름들
고도를 높이자 주변의 산 이름들이 하나둘 떠올랐다.
광덕산.
상해봉.
도마치봉.
그 너머 국망봉과 강씨봉.
이 일대의 산들은 따로 떨어진 봉우리가 아니라 오랜 산줄기를 함께 이루고 있다. 백운산은 포천 이동면과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경계에 자리한 산으로, 도마치봉과 국망봉 등 주변의 높은 산들과 이어지는 한북정맥의 산이다.
이름을 하나씩 떠올리니 산들이 단순한 지형이 아니라 오래전 친구들의 이름처럼 느껴졌다.
특히 강씨봉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오래된 이야기가 따라왔다.
강씨봉자연휴양림 공식 안내에는 강씨봉 이름에 두 가지 유래가 함께 소개되어 있다. 하나는 논남기 계곡 상류에 강씨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에 강씨봉이라 불렀다는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궁예의 왕후 강씨가 이 골짜기에 숨어 살았다는 이야기다. 한국지명총람에도 “강씨봉 마을에는 궁예의 왕후 강씨의 집터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한다고 한다.
역사는 기록으로 남고, 전설은 사람의 입에서 사람의 입으로 건너간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알 수 없어도 나는 그런 이야기가 좋다.
한겨울 눈 덮인 능선 어딘가를 바라보니 문득 한 여인이 떠올랐다.
왕의 곁에 있었지만 왕을 떠나야 했던 사람.
권력의 중심에 있었으나 결국 깊은 산골짜기로 숨어들었다는 사람.
그녀가 실제 이곳을 걸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깊은 산이라면 사람 하나의 슬픔을 오래 숨겨주었을 것 같았다.
산은 사람에게 묻지 않는다.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잃었는지,
왜 숨어들었는지.
그저 들어온 사람에게 숲 한쪽을 내어준다.
아마 그래서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상처를 입으면 산으로 들어왔는지도 모른다.
눈 속에서 만난 오래전의 나
능선으로 오를수록 눈은 깊어졌다.
어떤 곳은 발목까지,
어떤 곳은 무릎 가까이,
바람이 눈을 몰아넣은 곳에서는 허벅지 가까이 빠졌다.
한 발을 들어 앞으로 놓으면 몸이 푹 내려앉았다. 다시 다리를 빼내고, 또 한 걸음을 옮겼다.
발을 디딜 때마다 눈이 낮게 소리를 냈다.
뽀드득.
뽀드득.
오랜만에 듣는 겨울의 소리였다.
여름 산에는 수많은 소리가 있다. 새가 울고, 벌레가 날고, 계곡물이 흐른다. 그러나 깊은 겨울 산은 소리를 줄인다. 눈이 숲의 모든 소리를 덮어버린다.
그 속에서 들리는 것은 내 숨소리와 눈 밟는 소리뿐이었다.
오랜만에 걷는 깊은 눈길이었다. 젊었을 때라면 힘으로 밀어붙였을 것이다. 앞사람의 발자국을 따라 속도를 높이고, 정상까지 걸리는 시간을 계산했을 것이다.
하지만 깊은 눈은 사람에게 속도를 허락하지 않는다.
서두르면 더 깊이 빠지고,
힘으로 밀어붙이면 먼저 지친다.
한 걸음 옮기고,
숨을 쉬고,
다시 한 걸음을 옮겨야 한다.
인생도 그런 것일까.
젊은 날에는 빨리 가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남보다 앞서가고, 높은 곳에 먼저 오르고, 가능하면 돌아가지 않는 것이 좋은 삶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세월을 살아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어떤 길은 빨리 걸을수록 놓치는 것이 많았고,
어떤 사람은 천천히 걸어야 오래 곁에 남았다.
눈길은 내게 말했다.
빨리 가지 않아도 된다고.
다만 멈추지만 않으면 된다고.
빛이 겨울을 밀어내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햇빛이 운무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희미한 빛 한 줄기였다. 그러다 구름 사이에 파란 하늘이 조금씩 열렸다. 빛이 가지에 닿자 상고대가 반짝였다.
얼음으로 피어난 꽃들이 마지막 빛을 내는 것 같았다.
앞쪽 하늘은 푸르게 열리고 있었고, 뒤쪽 능선은 아직 운무 속에 잠겨 있었다.
한 자리에 서서 두 개의 세계를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한쪽에는 겨울이 남아 있고,
다른 한쪽에는 벌써 봄으로 건너가는 듯한 빛이 있었다.
나는 그 경계에 한동안 서 있었다.
이런 순간 때문에 산에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도시에서는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이 내일이 되는 순간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산에서는 계절이 바뀌는 순간이 보인다.
구름 한 장이 움직이고,
햇빛 한 줄이 나뭇가지에 닿으면서,
세상이 달라진다.
강씨봉 너머의 이야기
능선을 걸으며 멀리 강씨봉과 국망봉 쪽 산줄기를 생각했다.
한북정맥은 단순한 등산로가 아니었다. 이 산줄기 아래에는 수많은 마을이 있었고, 전쟁과 피난의 기억도 있었으며, 군부대와 함께 살아온 포천 이동 사람들의 삶도 있었다.
산 위에서 보면 마을은 작다.
그러나 그 작은 마을마다 사람들의 긴 이야기가 있다.
포천 이동면도 그렇다.
오늘날 이동이라 하면 많은 사람이 먼저 이동갈비를 떠올린다. 그러나 이동갈비의 시작은 화려한 관광 음식이라기보다 이 지역의 군사적 환경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보도에 따르면 포천 이동갈비촌은 1950년대 후반부터 군인과 면회객을 대상으로 저렴하고 푸짐한 갈비를 파는 식당들이 생기면서 조성되었고, 1980년대 산악회와 관광객들의 입소문을 타며 ‘이동갈비’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생각하면 오래전 포천의 풍경이 떠오른다.
휴가 나온 군인.
아들을 만나러 버스를 타고 먼 길을 찾아온 어머니.
면회를 마치기 전 함께 마주 앉아 갈비를 굽던 가족.
숯불 위에서 고기가 익는 동안 어머니는 아들의 얼굴을 몇 번이고 바라보았을 것이다.
밥은 잘 먹고 있니.
힘들지는 않니.
물어보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막상 만나면 별말 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 익은 고기를 아들의 밥그릇 위에 올려주었을 것이다.
이동갈비에는 어쩌면 그런 시절의 풍경도 함께 구워지고 있었는지 모른다.
지금은 많은 사람이 백운계곡을 찾고, 산행을 마친 등산객들이 갈비집에 앉아 하루의 피로를 푼다. 하지만 음식 하나에도 한 지역의 세월이 들어 있다.
군인들의 허기를 채우던 음식이,
면회객의 추억이 되고,
산악회의 뒤풀이 음식이 되고,
마침내 한 지역을 대표하는 이름이 되었다.
산도 그렇고 음식도 그렇다.
오래 살아남은 것에는 그 안에 사람의 시간이 들어 있다.
백운산이라는 이름
백운산.
우리나라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산이 많다.
흰 구름이 머무는 산.
이름만으로도 산의 모습이 그려진다.
포천의 백운산은 포천시 이동면과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사이에 자리한다. 민간 산행 정보에서는 해발 약 903m로 표기되기도 하고, 주변에는 도마치봉과 국망봉 등 높은 산줄기가 이어진다. 백운계곡은 백운산과 광덕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만든 포천의 대표 계곡으로 알려져 있다.
그날의 백운산에는 흰 구름보다 흰 눈이 먼저 머물고 있었다.
눈은 산의 굴곡을 지우고,
바위의 모서리를 감추고,
나무의 상처까지 덮고 있었다.
산 전체가 잠시 부드러워 보였다.
그러나 눈 아래에는 돌이 있고,
얼음이 있고,
거친 뿌리가 있었다.
사람의 삶도 비슷하지 않을까.
겉으로는 평온해 보여도 그 안에는 다른 사람이 모르는 돌과 얼음이 있다.
산은 그것을 굳이 드러내지 않는다.
그저 눈이 오면 눈을 받고,
비가 오면 비를 맞는다.
🍂 오늘의 시
겨울 산에서 / 송현
사라진 눈꽃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가장 찬란했던 것은
가장 먼저 물러나고,
가지들은
본래의 얼굴로 돌아간다.
강씨봉의 전설도,
한북정맥을 걷던 젊은 날도,
면회 온 어머니가
아들의 밥그릇에 올려주던
따뜻한 갈비 한 점도,
모두 지나간 시간 속의 풍경이다.
그러나 지나갔다고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산의 이름으로 남고,
어떤 것은 음식의 이름으로 남으며,
어떤 것은 사람의 마음에
흰 자국 하나로 남는다.
삶도
저 상고대와 같은 것인지 모른다.
잠시 피어나
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고,
햇빛 한 줄에
소리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사라진 자리 앞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한때 내 곁에 머물렀던 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산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나는 천천히 눈길을 내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백운산의 나무들은
벌써 눈꽃을 벗고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한북정맥의 긴 능선 위로
하얀 상고대가 피어 있었다.
사라지는 상고대
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산을 오를수록 햇빛이 강해졌다. 처음에는 가지 끝에서 작은 물방울 하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또 하나.
상고대가 녹기 시작한 것이다.
아침의 산을 가득 채우던 흰 꽃은 조금씩 사라졌다. 가장 찬란했던 풍경이 가장 먼저 물러가고 있었다.
조금 아쉬웠다.
산행을 시작할 때 만난 그 눈꽃이 정상까지 함께해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러나 산은 사람의 바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햇빛이 비치면 얼음은 녹았고, 바람이 불면 가지에 붙어 있던 눈은 떨어졌다.
그 자리에 남은 것은 본래의 나무였다.
화려하지 않은 가지.
구부러진 몸.
부러진 흔적.
겨울을 견디고 있는 나무의 진짜 얼굴이었다.
나는 그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어쩌면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본래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꽃도 그렇고,
눈도 그렇고,
젊음도 그렇고,
사람의 인연도 그렇다.
영원할 것 같던 순간이 지나고 나면 결국 남는 것은 그 시간을 지나온 우리의 얼굴이다.
산은 덧입은 것을 오래 붙잡지 않는다.
눈이 오면 흰옷을 입고,
햇빛이 오면 다시 벗는다.
사람만이 지나간 것을 오래 붙잡고 산다.
오래 걸은 사람만이 아는 것
백운산을 걸으며 오래전 한북정맥 종주 시절을 자꾸 떠올렸다.
그때는 산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았다. 다음 봉우리가 있었고, 그 너머에도 또 하나의 봉우리가 있었다. 힘들어도 젊음은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지금은 조금 다르다.
산길 앞에서 먼저 내 몸을 살피고,
무릎의 상태를 생각하고,
해가 지기 전에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를 더 신중하게 계산한다.
그러나 나이가 든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예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눈꽃 아래 숨어 있는 마른 가지가 보이고,
산 이름 뒤에 숨은 사람의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강씨봉이라는 이름을 만나면 그곳에 살았다는 사람들을 생각하고, 이동갈비 한 점을 보면서 군인과 면회객이 마주 앉았던 오래된 시간을 생각한다.
젊을 때는 산을 정복하려 했다면,
이제는 산의 이야기를 들으려 한다.
그 차이가 세월이 내게 준 것인지도 모른다.
에필로그|사라지는 것과 남는 것
하산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침에 하얗게 빛나던 능선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햇빛을 받은 상고대는 대부분 사라졌고, 나무들은 다시 겨울 본래의 얼굴로 서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아쉽지만은 않았다.
눈꽃이 사라졌기 때문에 아침의 풍경이 더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이 계속 머문다면 사람은 그것을 기억하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사라지기 때문에 바라보고, 떠나기 때문에 그리워하며,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기 때문에 마음에 담는다.
광덕고개의 바람에서 시작한 산행이었다.
한북정맥의 오래된 기억을 만났고, 강씨봉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떠올렸으며, 포천 이동의 오래된 삶까지 생각했다.
그러다 산 위에서 가장 오래 바라본 것은 결국 사라지는 눈꽃이었다.
산은 그날에도 말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 보여주는 쪽을 택했다.
가장 찬란했던 것은 가장 먼저 물러났다.
그러나 지나갔다고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떤 것은 산의 이름으로 남고,
어떤 것은 음식의 이름으로 남으며,
어떤 것은 사람의 마음에 흰 자국 하나로 남는다.
삶도 저 상고대와 같은 것인지 모른다.
잠시 피어나 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고,
햇빛 한 줄에 소리 없이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는 사라진 자리 앞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한때 내 곁에 머물렀던 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산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나는 천천히 눈길을 내려왔다.
뒤를 돌아보니 백운산의 나무들은 벌써 눈꽃을 벗고 있었다.
그러나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한북정맥의 긴 능선 위로 하얀 상고대가 피어 있었다.
🌿 이 산행을 준비하는 분들을 위해
포천 백운산은 광덕고개에서 접근하면 비교적 짧은 시간 안에 한북정맥 능선과 겨울 산의 분위기를 만날 수 있는 산행지다. 다만 겨울에는 적설량과 결빙 상태에 따라 난이도가 크게 달라진다. 산행 전날과 당일의 기상, 도로 상황, 바람 세기를 반드시 확인하는 것이 좋다.
백운계곡은 포천시가 소개하는 대표 계곡 관광지이며, 광덕산과 백운산 정상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이룬 약 10km 길이의 골짜기다. 겨울 산행 후에는 백운계곡 일대와 포천 이동면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광덕고개는 포천과 화천을 잇는 고갯길로, 겨울철에는 도로 결빙과 강풍의 영향을 받을 수 있다. 자가용으로 접근할 경우 차량 월동장비와 도로 통제 여부를 미리 확인하는 것이 안전하다.
🌿 산행 준비 메모
백운산 겨울 산행은 ‘짧은 코스’보다 ‘겨울 능선’이라는 점을 먼저 생각하는 편이 좋다. 눈이 깊은 구간에서는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체력 소모도 커진다.
상고대는 오래 머물지 않는다. 기온과 습도, 바람, 햇빛 조건에 따라 순식간에 피고 사라진다. 사진을 찍는 것도 좋지만, 눈앞의 풍경을 오래 바라보는 시간이 더 오래 남을 때가 있다.
🌿 관련 사이트 및 여행 정보
🌿 ① 포천시 문화관광
백운계곡과 포천 이동면, 산정호수, 포천아트밸리 등 포천 여행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 ② 백운계곡 관광 정보
백운계곡 위치와 이용 안내를 확인할 수 있다. 포천시 문화관광은 백운계곡을 연중무휴, 상시개방 장소로 안내한다.
🌿 ③ 강씨봉자연휴양림
강씨봉의 이름 유래와 논남기 계곡, 자연휴양림 이용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공식 안내에는 강씨들이 모여 살았다는 유래와 궁예 왕후 강씨 관련 전승이 함께 소개되어 있다.
🌿 ④ 포천 이동갈비촌 여행 정보
포천 이동면 일대 여행과 음식 정보를 함께 확인할 수 있다. 이동갈비는 군인과 면회객, 산행객의 시간이 쌓여 포천을 대표하는 음식 문화로 자리 잡았다.
🌿 ⑤ 시외버스 예매
포천 이동면이나 인근 지역으로 대중교통 이동을 계획할 때 시외버스 노선과 예매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 백운산 눈꽃산행 준비물 체크리스트
□ 아이젠 또는 체인젠
□ 스패츠
□ 접지력 좋은 겨울 등산화
□ 방풍 재킷
□ 보온 장갑과 여벌 장갑
□ 보온 모자 또는 바라클라바
□ 충분한 식수와 따뜻한 음료
□ 행동식
□ 선글라스 또는 고글
□ 보조배터리
□ 헤드랜턴
□ 겨울 도로 상황을 확인하는 여유
🌿 추천 숙박
🏡 포천 이동면·백운계곡 일대
백운산 겨울 산행과 이동갈비, 백운계곡 여행을 함께 계획한다면 포천 이동면이나 백운계곡 일대를 숙박 거점으로 잡는 것이 좋다. 아침 일찍 광덕고개로 이동하기 편하고, 산행 후 포천 이동갈비촌과 연계하기에도 좋다.
🏡 산정호수·일동권
포천 여행을 1박 2일로 넓게 잡는다면 산정호수나 일동권 숙박도 생각해볼 수 있다. 백운산 산행 뒤 산정호수, 온천, 포천아트밸리 등을 함께 연결할 수 있다.
🌄 이전 산행 이야기 다시보기
「산바람 · 글바람 ⑭」 굴봉산 산행기, 사라진 길에서 옛날의 나를 만나다
굴봉산에서는 십 년 전 기억 속에 남아 있던 징검다리와 소나무 숲을 찾아 나섰지만, 다시 만난 산길은 예전과 달라져 있었습니다.
들머리는 막혀 있었고 길은 희미했으며, 사유지라는 말 앞에서 서운함도 느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산에서 만난 것은 사라진 길만이 아니었습니다. 굴봉산은 길을 잃게 함으로써 오래전의 나를 다시 만나게 해준 산이었습니다.
🌄 다음 산행 이야기
「산바람 · 글바람 ⑯」 곰배령 산행기
포천 백운산에서는 광덕고개에서 계획을 바꾸어 한북정맥 능선으로 들어섰고, 겨울 숲에 핀 상고대를 만났습니다. 눈꽃은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오래 머물지 않았고, 사라지는 그 자리에서 오히려 무엇이 마음에 남는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에는 강원도 인제의 곰배령으로 향합니다. 숲과 야생화, 완만한 길이 어우러진 곰배령에서는 거친 산행보다 자연의 숨결을 천천히 따라 걷는 시간을 만나보려 합니다. 백운산이 사라지는 눈꽃 앞에서 남는 것의 의미를 알려준 산이었다면, 곰배령에서는 조용한 숲길 위에서 다시 피어나는 것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곰배령은 산림유전자원보호구역으로 운영되는 생태탐방지이며, 산림청 점봉산 곰배령 산림생태탐방은 사전예약제로 운영된다. 산행을 계획할 때에는 예약 가능 일정과 탐방 조건을 반드시 확인하는 것이 좋다.
🍃 산길의 끝에서
포천 백운산에 간 것은 처음 계획했던 일이 아니었다.
광덕고개에서 광덕산으로 오르려다, 문득 마음이 백운산 쪽으로 기울었다.
산에서는 가끔 그런 일이 있다.
정해놓은 길보다,
그날 마음이 부르는 길이 더 선명해지는 순간.
그렇게 들어선 백운산 능선에서 나는 오래전 한북정맥을 다시 만났다. 지도와 나침반을 들고 능선을 찾아다니던 젊은 날이 발밑의 눈소리와 함께 되살아났다.
그리고 산은 뜻밖에도 상고대를 먼저 보여주었다.
산행의 끝에서 만나야 할 것 같은 풍경이 시작부터 피어 있었다.
나무마다 하얀 꽃을 달고 있었고,
빛이 닿을 때마다 얼음 결정은 유리처럼 반짝였다.
그러나 그 찬란한 순간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햇빛이 강해지자 상고대는 하나둘 녹기 시작했고, 흰 꽃을 벗은 나무들은 다시 본래의 얼굴로 돌아갔다.
처음에는 아쉬웠다.
조금 더 오래 머물러주었으면 했다.
하지만 산은 붙잡지 않았다.
눈이 오면 눈을 받고,
햇빛이 오면 다시 벗었다.
사람만이 지나간 것을 오래 붙잡고 산다.
백운산에서 나는 사라지는 것들을 바라보았다.
상고대.
젊은 날의 한북정맥.
강씨봉에 남은 전설.
포천 이동갈비에 담긴 군인과 면회객의 시간.
모두 지나간 것들이지만,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어떤 것은 산의 이름으로 남고,
어떤 것은 음식의 이름으로 남고,
어떤 것은 마음속에 흰 자국 하나로 남는다.
삶도 어쩌면 저 상고대와 같은 것인지 모른다.
잠시 피어나 세상을 가장 아름답게 만들고,
햇빛 한 줄에 소리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사라진 뒤에야 우리는 알게 된다.
한때 내 곁에 머물렀던 것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백운산의 나무들은 이미 눈꽃을 벗고 있었지만,
내 마음속에는 아직도 한북정맥의 긴 능선 위로 하얀 상고대가 피어 있었다.
다음 산길에서 다시 만나겠습니다.
⭐ 산바람 · 글바람
광덕고개에 섰을 때
처음 계획한 산은 백운산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산에서는
가끔 길보다 마음이 먼저 방향을 정합니다.
그날 나는
광덕산 대신 백운산으로 걸었습니다.
눈 위에 첫발을 올리자
오래전 한북정맥의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지도와 나침반을 들고
능선을 찾아다니던 젊은 날,
앞으로만 걷던 시절의 내가
눈소리 사이로 조용히 따라왔습니다.
그리고 겨울은
생각보다 일찍 꽃을 피워두고 있었습니다.
나무마다 상고대가 피었고,
하얀 얼음꽃은
햇빛을 받아 유리처럼 빛났습니다.
하지만 가장 찬란한 것은
오래 머물지 않았습니다.
햇살이 강해지자
상고대는 가지 끝에서 녹기 시작했고,
나무들은 다시
본래의 얼굴로 돌아갔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사라진다고 해서
모두 없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씨봉의 전설도,
한북정맥을 걷던 젊은 날도,
면회 온 어머니가
아들의 밥그릇에 올려주던
따뜻한 갈비 한 점도,
모두 지나간 시간 속의 풍경이지만
어딘가에 남아 있다는 것을.
어떤 것은 산의 이름으로 남고,
어떤 것은 음식의 이름으로 남으며,
어떤 것은 사람의 마음에
흰 자국 하나로 남습니다.
백운산의 나무들은
눈꽃을 벗고 있었지만,
내 마음속 한북정맥 능선에는
아직도 하얀 상고대가 피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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